올해 서울의 사립 명문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한길(21·가명)씨는 중고교 학창 시절 내내 스스로를 '이과형 인간'이라 생각했다. 국어와 사회, 역사 과목보다는 수학과 과학 과목이 적성에 맞았고, 성적도 괜찮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의사의 꿈을 키웠다.
2년 전 서울의 한 사립대 전자전기공학부에 합격했던 그는 의대 진학을 위해 지난해 세 번째 수능을 치렀다. 탐구영역도 사회탐구는 선택하지 않고, 의대 입시생들이 많이 고르는 생명과학Ⅰ과 지구과학Ⅰ을 골랐다. 시험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인문계열 대학에 갈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능 점수는 이씨가 원하는 의대나 의약 계열 대학에 진학하기엔 충분치 않았고, 그때서야 경영대로 눈을 돌렸다. 지난해 처음 실시된 문·이과 통합 수능으로 가능해진 교차 지원 덕이었다.
이씨는 "의대 진학은 불가능했지만 명문대 경영대학을 가기엔 점수가 충분하다는 걸 알고, 오로지 학교 이름만 보고 지금 다니는 대학을 택했다"고 말했다. 이과생이 주로 고르는 수학 선택 과목인 '미적분'에서 문과생보다 높은 표준점수를 받은 게 도움이 됐다. 이씨는 "경영대 동기들은 나처럼 이과에서 교차 지원한 경우가 정말 많다"고 했다.
이씨의 대학 친구들은 '학점이 잘 나오면 로스쿨, 안 나오면 공인회계사'로 진로를 정하는 분위기다. 그는 "다시 의대 입시를 준비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나도 로스쿨이나 회계사를 택하게 될 것 같다"며 "이전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미래라 적성에 맞을지 걱정도 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고교생들의 문·이과 칸막이를 없애고 융합형 인재를 키우자는 취지로 도입된 문·이과 통합형 수능이 현실 입시에선 꿈과 적성을 무시하고 단 한순간에 인생 진로마저 바꿔버리는 통로로 작용하고 있다. 극심한 취업 경쟁 속에서 '플러스 점수'를 얻기 위해 문·이과의 문턱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성적 상위권 이과 학생·학부모에겐 문·이과 통합 수능이 '명문대 문과 진학'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안전판'처럼 여겨지고 있다. 난이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높은 표준점수를 받을 수 있는 이과 선택과목을 공부해 수능을 잘 치르면 계획대로 이른바 '의치한약수'(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 등 의약계열)를 두드리고, 안 되면 명문대 문과 계열 입학을 노리는 것이다. 학교의 '이름값'이 향후 취업 경쟁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둔 A(49)씨는 "아이는 원래 문과 과목에 흥미가 없었고 수학에 흥미를 보여서 수학교육과 진학을 원하고 있지만, 부모 입장에선 문과로 바꾸면 학교 레벨이 달라질 수 있어서 교차 지원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진 대학 간판보다 전공을 따지는 아이 의사를 존중하려 하지만, 수능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으면 아이도 생각을 바꿀 것으로 생각한다"며 "적성에 맞지 않은 인문계열 학과에서 적응을 못할까 걱정되긴 하지만, 다시 수능을 보는 방법도 있다"고 덧붙였다.
화학·생명공학 계열 진학을 희망하는 고3 수험생 한모(18)양은 "교차지원 생각이 없진 않다"며 "지금 모의평가 성적으로 이과에 가면 성균관대 정도 갈 수 있지만, 문과로 지원하면 연세대나 고려대도 갈 수 있다. 문과로 교차지원하면 대학이 한두 단계 정도 올라가는데 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실제 지난해 입시에서 경희대 물리학과와 건국대 컴퓨터공학과에 지원 가능했던 이과생이 연세대 경영학과에 교차지원해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동국대 자연계열에 지원 가능한 수험생이 고려대 인문계열과 서강대 경영학과에 합격했고, 숭실대 자연계열 지원자가 연세대 경제학부에 합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교차지원을 통해 상위 레벨 대학의 인문계열 학과로 진학한 학생들 중 부적응으로 이탈하는 케이스도 적지 않다. 이과 출신으로 재수한 끝에 지난해 수능을 치러 서울 소재 사립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 B(21)씨는 "선배나 동기들은 대부분 행정고시나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 준비과정도 힘들뿐더러 나는 학과 공부에도 별 흥미를 못 느낀다. 요즘 뜨고 있는 반도체 계약학과를 목표로 3수를 준비하는중"이라고 밝혔다.
수도권 대학의 한 교육학과 교수는 "문·이과 통합수능은 입시에 불이익을 받는 문과생뿐만 아니라,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택하는 이과생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전공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시 대입을 준비하는 사회적 비용 등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