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 납치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온 나라에 파다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1990년대였다. 길가는 사람들을 봉고차에 탄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낚아챈 뒤 남자는 새우잡이 배의 선원으로, 여자는 마늘 까는 인부로 팔아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저물녘 한적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이웃 동네 아주머니가 봉고차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경험담도 들려왔다.
그 얘기를 들으며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저 일이 오죽 채산성 떨어지고 인기 없으면 납치까지 해가며 인부를 동원할까? 새우잡이 선원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마늘 까는 게 얼마나 지겹고 재미없는지는 체험으로 깨우친 바였다. 어린 날, 엄마는 마늘 까는 일을 대놓고 우리 손에 맡겼다. “밑동은 과도로 싹 도려내고, 속껍질까지 야무지게 벗겨내거라.” 명을 받들어 마늘 까는 일은, 냄새는 어찌어찌 참는다 해도 작업 자체가 몸서리쳐질 만큼 진력이 났다. 엄지손톱이 시커메지도록 두어 시간 쪼그려 앉아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단군신화 속 호랑이가 아마도 이걸 못 견뎌 동굴을 뛰쳐나갔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까지 들었다. 그럴 때면 이러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우리야말로 미련한 곰의 후손임이 틀림없다고 낄낄댔다.
성인이 되어 내 살림을 꾸리면서 한동안 마늘을 먹지 않았다. 지긋지긋하던 기억이 더는 통마늘을 손질하기 싫게 만들었고, 깐마늘을 사다 먹자니 이 마늘이 과연 누구의 손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걸까, 찝찝한 마음을 털어낼 수 없었다. 한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슬슬 햇마늘의 달큼한 맛이 그리워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마늘의 효용에 관한 말에도 귀가 솔깃해졌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한 톨의 볍씨가 발아해서 성장하면 수백 개 알곡이 맺는다. 콩이나 고추 한 포기의 수확량도 만만치 않다. 오이나 토마토의 경우, 그루당 수십 수백 개 열매를 시차를 두고 따먹는 재미까지 누린다. 마늘은 다르다. 마늘 한 쪽을 심어서 얻을 수 있는 건 통마늘 하나가 전부다. 인풋 대비 아웃풋의 관점에서 보면 퍽 재미없는 작물이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마늘을 심은 건 가능한 한 내가 먹는 식재료의 이력을 파악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알량한 신념 때문이었다. 지난가을 석회가루 뿌려둔 땅에 육쪽마늘 종자를 심은 후 세심하게 관리했다. 가뭄 탓인지 6월이 되어 수확한 마늘은 6쪽 아닌 8쪽이 5할이었다. 실망스러워하는 엄마를 착하게 위로했다. 애써 키워 고라니들 뷔페로 바친 옥수수와 대추 묘목, 미나리에 비하자면 온전하게 수확한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잖냐고.
‘흙내 나는 통마늘을 가져다가 손수 까서 먹을 사람만 손을 드시오.’ 단서를 달아 주변인들에게 분양하고 남은 두 접이 내 몫이었다. 서늘한 베란다 한쪽에 마늘을 널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열 통씩 깐다. 대략 보름간 먹을 양이다. 한데 조카가 와서 엊저녁에 힘들여 까둔 마늘을 기름에 넣어 왕창 튀겨버렸다. 시즌 한정 별미라며 햇마늘 튀김을 맛나게 먹는 그에게 ‘네가 먹은 양만큼 네 손으로 까놓고 가라’ 말하려는데 예쁘게 손질한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저 손톱이 다 망가지겠구나. 내 속을 알 리 없는 조카는 기름기 배인 입술로 배 두드리며 떠나고, 거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나는 다시 마늘을 깐다. 웅녀의 후손답게 기꺼이, 궁상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