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자 평화헌법 개정 추진을 거리낌없이 언급했다. 우리 정부에 가장 껄끄러운 악재가 터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려의 목소리를 낼 법도 하건만, 박진 외교부 장관은 다음날 '한일관계 개선'을 강조하며 원론적 입장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판을 바꾸기 어려운 양국관계의 답답한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 장관은 당초 선거 이후 이달 안에 일본을 찾을 예정이었다. 강제징용 배상문제가 워낙 심하게 꼬인 터라 실마리를 풀 것으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아베 신조 전 총리 피격 사망으로 '조문 외교'가 전면에 부각됐다. 다른 현안들은 당분간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국이 소통 채널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운 구도로 흐르고 있다.
박 장관은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고민을 드러냈다. 박 장관은 “방일 일정을 조율하던 와중에 아베 전 총리의 피격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며 “일본 측과 계속 조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박 장관은 당초 18일 일본을 찾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박 장관은 대신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아베 전 총리는 일본 헌정사상 최장수 총리를 지냈고, 일본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이라며 "이번에 일본 방문이 이뤄지면 찾아뵙고 여러가지 조언을 들어보려 생각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기시다 총리는 전날 밤 선거 승리가 확실시되자 방송에 출연해 "개헌 발의를 위해 3분의 2 결집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며 아베 전 총리의 숙원이었던 개헌 추진 의지를 밝혔다. 일본 헌법 9조는 '전쟁·무력행사의 영구적 포기, 전력 불보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를 놓고 '자민당 승리로 자위대 합헌화 등 개헌이 가능하고 한일관계가 악화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박 장관은 “일본의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예의주시하면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일 생각”이라고 즉답을 피했다.
이르면 다음 달로 임박한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는 한일관계의 또 다른 난제다. 박 장관은 현금화의 근거인 2018년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는 입장”이라면서도 “일본에서는 지금 현금화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금화가 이뤄지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 방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한일관계는 뾰족한 해법 없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자민당과 공명당 등 헌법 개정에 긍정적인 4개 정당이 압승했지만 각론을 두고 이해관계가 달라 개헌은 힘들다”면서도 “온건파인 기시다 총리가 당장은 ‘한일관계에서 사죄와 반성은 없다’는 아베 전 총리의 유산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룸(공간)을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포스트 아베’를 노리는 세력들 간 권력구도 재편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일관계를 예단하기 이르다”면서도 “분명한 건, 한일관계를 풀어 가려는 한국 외교가 더 어려워졌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 장관은 이날 중국에 대해 “한중 양국은 상호 존중과 신뢰를 쌓으며 평등하게 협력하는 좋은 동반자가 돼야 한다”며 “중국과의 평등외교는 당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만간 중국 방문을 추진할 것이고 하반기 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방한, 그리고 차관급 전략대화 등을 통해 중국과의 전략적 대면 소통을 강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