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감독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해요. 연기할 힘을 다시 얻었습니다.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졌어요.”
똑 부러진 인상은 여전했다. 목소리는 또랑또랑했고 말은 막힘이 없었다. 10일 오후 경기 부천시 한 호텔에서 만난 배우 문근영은 감독 데뷔식을 막 치른 뒤의 흥분에 젖어 있었으나 답변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는 이날 오후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자신이 연출한 단편영화 3편을 첫 상영했다.
‘감독 문근영’이 선보인 영화는 ‘심연’과 ‘현재진행형’ ‘꿈에 와 줘’다. 9분(‘심연’·‘현재진행형)과 15분(‘꿈에 와 줘’)짜리 짧은 영상으로 실험정신이 충만하다. ‘심연’은 물 안에서 유영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문근영이 연기를 겸했다. 여인은 물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듯 몸부림치나 수면 밖에는 또 다른 수면이 존재한다. 영화는 배우 문근영의 심정을 담았다. 그는 “배우로서 어떤 한계를 부쉈다고 생각했는데도 또 다른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며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을 때 쓴 글이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진행형’은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에 갇힌 한 남자(정평)를 통해 배우의 삶을 그린다. 문근영은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숙명을 그리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직업에 대한 고민을 담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꿈에 와 줘’는 실연한 한 남자(안승균)가 꿈속에서 옛 연인과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렸다.
‘심연’ 등은 지인들과의 공동작업 결과다. “연기에 대한 가치관과 지향성이 엇비슷한” 배우 정평과 안승균이 함께했다. 세 사람은 ‘바치’라는 창작집단을 만들어 ‘심연’ 등을 지난해 7월과 8월, 9월 각각 만들었다. 마음 맞는 셋이 언제 한번 함께 일해보자고 말만 나누다가 문근영이 ‘심연’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바치’는 현실이 됐다. 문근영은 “가수나 무용가들과 달리 배우는 왜 자기 이야기를 연기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걸까 의문을 가졌다”며 “서로 소통하며 연기로 뭔가를 표현하자고 해서 셋이 의기투합을 했다”고 말했다.
제작비는 문근영이 댔다. 그는 “액수를 절대 말할 수 없다”면서 “‘엄마 펀드’가 요긴하게 쓰였다”며 웃었다. 오랜 연기 생활이 연출에 큰 도움이 됐다. 문근영은 “콘티가 저절로 그려져 저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연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심연’과 ‘현재진행형’은 딱 하루 촬영했고, ‘꿈에 와 줘’는 이틀 걸렸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려 했다. 문근영은 “꼼꼼히 따지고 준비하는 제 성격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문근영은 “어쩌다 연출을 하게 된 거지 작정한 건 아니다”고 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감독님이라고 부르면 낯설고 낯간지럽다”고 말했다. “장편영화 연출 욕심은 안 낼 듯하다”며 상업영화 연출 제안을 혹시 받아도 “다시 생각해보라고 제가 오히려 뜯어말릴 듯하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가 원하는 연기를 해줄 때, 내가 의도한 대로 촬영 각도가 나왔을 때 짜릿짜릿했다”며 “연출은 계속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각본 쓰고 배우 만나고 콘티 짜고 촬영장 알아보고 편집하는 등 모든 제작 과정에 제가 관여할 수 있어 너무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