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병·의원에서 일하는 보건의료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로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들은 낮은 임금, 수당 미지급, 출산휴가·육아휴직 미보장 외에도 병원장으로부터 폭언이나 욕설 등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병원장이 마음대로 고용·해고할 수 있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용불안까지 느끼고 있었다.
보건의료노조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중소병원·의원 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는 중소병·의원에서 일하는 보건의료노동자 4,058명이 참여했다. 직종별로는 의료기사(방사선·임상병리·물리치료사) 65.5%, 간호직(간호·간호조무사) 23.6% 등이었다.
조사 결과 지난해 실수령 연봉이 2,000만 원대인 경우가 35.1%(903명)였다. 2,000만 원 미만 연봉도 1%(39명)였다. 수당과 사회보험료 등을 고려했을 때 최저임금(2021년 8,720원) 기준 연 1,984만~2,272만 원 정도를 실수령해야 함에도, 이에 못미치는 경우가 1.4%(53명)였다. 서울시 생활임금 기준(2,411만~2,868만 원)으로는 13.1%가 이보다 적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보고서는 "실제 수당이나 야간근무 일수를 대입하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비율은 더 많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년차 간호조무사 A씨는 5년째 일하는 의원에서 법정수당과 간식비를 제외하고 월 196만 원을 받고 있었다. 최저 월급여(191만 원)보다 불과 5만 원 많은 수준이다.
연장근무나 야간·주말근무 등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연장(67.1%)·야간(45%)·주말(88.2%) 근무를 한다는 응답자 중 수당을 받지 못한 이들은 △주말 40.7% △연장 15% △야간 7% 순으로 많았다. 수당을 준다 해도 실제 근무 시간과 달리 정액 지급하거나 포괄임금제 형식으로 변형 지급하는 경우는 △야간 30% △연장 26% 순이었다.
출산휴가·육아휴직 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일수록 심했다. 의료기관이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각각 15%, 20%였는데, 5인 미만 의료기관의 미보장 비율은 24.4%, 30.5%로 훨씬 높았다. 중소병·의원 노동자를 7년째 상담해 온 오명심 보건의료노조 인천지역지부장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출산 시 퇴직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병원장이 결혼·출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20대 초반 직원을 주로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병원장으로부터 괴롭힘 등 비인격적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30%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들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 고발도 어렵다. 간호사 B씨는 "원장이 소리치고 폭언한 뒤 사과를 한다"면서 "원장 병원이라 문제제기 않고 견디다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허리를 다쳐 오래 서 있기 힘든 간호사를 수술실로 발령해 퇴직을 종용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응답자 10명 중 4명은 고용불안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52.5%가 불안감을 느껴 5인 이상(38.3%) 사업장에 비해 크게 높았다. 응답자 중 3년 미만 근속자 비율이 53.6%로 높았다. 오 지부장은 "개원의 모임에서 평판이 공유되기 때문에 '찍히면 취업 못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다"면서 "'냉난방이 잘 안 돼 환자가 힘들어한다'고 문제제기를 했다가, 직원들과 불화가 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된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보건의료노조는 이번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와 단체교섭을 추진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에 속한 10.5%의 의료인력을 제외한 이들에게도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는 게 교섭의 골자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보건의료노동자가 행복해야 환자, 국민이 행복하고, 환자 안전과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도 가능하다"면서 "사각지대에 놓인 중소병·의원 노동자들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교섭을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