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2020년 서해에서 북한군 총격으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자진 월북을 입증할 근거가 없다고 16일 발표했다. 자진 월북에 무게를 뒀던 문재인 정부 발표 내용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진전을 목표로 종전선언 추진에 주력하느라 '북한 눈치보기'에 급급해 사건을 축소·왜곡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깔려있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은 이날 오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정보공개청구 소송의 항소를 전격 취하했다. 2020년 9월 서해상 표류 중 북한군 총격에 사망한 뒤 시신이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 이모씨에 대해 월북 시도로 단정한 것은 잘못됐다는 판단에서다. 당시 이씨의 유족들은 자진 월북 의심을 벗기 위해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진행해 1심에서 승소했으나, 문재인 정부 안보실이 항소했었다.
대통령실은 전 정부의 판단을 뒤집은 데 대해 "신구 갈등이 아니라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정부가 응답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씨 유족을 만나 진상 규명을 공언한 만큼, 약속을 이행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게 피살됐음에도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에 국가가 제대로 응하지 않은 건 잘못"이라면서 "과거의 부당한 조치를 시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씨에 대한 전 정부의 월북 단정에 대해 "실제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는 저희가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저자세 때문에 피살 공무원 사건 진실이 은폐된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저희도 모든 기록물을 다 본 것은 아니다"면서도 "민간인이 북한군에 의해 피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진 만행이 있었는데 뚜렷한 근거 없이 '자진 월북' 프레임 때문에 한 사람의 잘못으로 규정됐다면,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결국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선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군 당국의 대응 과정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대통령기록물'을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관련 대통령기록물은 15년간 봉인돼 있어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 △서울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 △이관한 전임 대통령 측의 해제가 있어야 열람이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즉각적인 '봉인 해제'가 어렵단 얘기다. 안보실 고위 관계자는 통화에서 "유가족이 헌법소원을 내면 사법부 판단을 받아본 뒤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며 관련 기록물 공개를 위해 힘을 쏟을 것임을 시사해 '장기전'을 예고했다.
윤석열 정부의 이날 발표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았다. 아직은 월북 의도에 대한 전·현 정부의 '해석 논쟁'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친문 성향이 강한 주요 인사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의원은 즉각 입장문을 내고 "오늘 해경의 발표는 월북 의도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도 내놓지 못한 채 어정쩡한 결론을 내려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홍영표 의원도 "당시 국방부가 비공개 회의로 사건 경위를 설명했을 때 여야 의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며 "선택적인 정보를 기초로 해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다면 불신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대통령기록물 봉인 해제나 당시 사건 보고·지시 라인에 있던 인사에 대한 사법처리 계획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칼을 대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만약 '안보 적폐를 바로잡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강력 드라이브가 문재인 정부 청와대를 정면으로 겨냥한다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진상 규명은 여야 정쟁의 최대 불씨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