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법조빌딩 방화 용의자 천모(53)씨는 사건 직전, 별다른 직업 없이 6억8,000여만 원을 투자한 주상복합 사업 소송에만 매달린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소송 때문에 대구 법원과 가까운 곳에서 낡고 저렴한 아파트를 구해 가족과 떨어져 살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천씨가 살던 집은 사건 현장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수성구 범어동에 위치한 5층짜리 아파트였다. 지은 지 40년 된 매우 낡은 아파트로, 전체 가구 수는 90여 개에 불과했다. 천씨는 이 중에서도 주방 1개와 방 1개, 욕실 1개로 구성돼 면적이 가장 작은 47㎡(약 16평) 규모의 집에 살았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따르면 이 집은 평균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정도다.
이날 직접 찾은 천씨 집에서는 문 틈으로 책상 위 컴퓨터와 모니터 정도만 보였다. 가구가 거의 없어 썰렁한 모습이었다. 천씨가 가족과 함께 살던 주민등록상 거주지는 대구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대구 법원과 가까운 범어동에 아파트를 임차해 홀로 살았다. 천씨는 주상복합 사업에 투자한 돈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 때문에 임대료가 저렴한 낡은 아파트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그는 민사소송을 진행하면서 재판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법정에서 피고측 변호사를 과도하게 비난해 재판부로부터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천씨는 건설업체 간부 출신이다. 하지만 주상복합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돈을 잃고 직장까지 그만두게 되자, 소송에 더욱 집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상복합 인근 상인들에 따르면, 건설업체에서 일하던 천씨는 대구로 발령받아 주상복합사업을 추진하던 시행사 대표를 알게 됐다. 사업성이 꽤 높다고 판단한 천씨는 거의 전 재산을 모아 주상복합 사업에 투자했고, 주변에도 권유했다. 하지만 사업이 지지부진했고, 투자금까지 묶이면서 지인들에게 원망을 듣게 된 천씨는 다니던 회사에서도 쫓겨나듯 그만뒀다.
대구의 한 부동산개발업체 임원은 “천씨가 건설업체에서 근무할 때 몇 번 만난 적 있는데 늘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많은 투자금에 직장까지 잃어 억울함에 소송만 매달린 것 같은데, 재판에서 졌다고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천씨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미리 흉기와 방화에 사용할 인화물질을 준비해 계획적으로 움직인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경찰 감식 결과, 천씨가 법조빌딩 방화 시 사용한 인화물질은 휘발유로 확인됐다. 사건 현장인 203호 사무실에선 휘발유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 유리 용기 3점과 휘발유가 묻은 수건 등 잔류물 4점, 사망자 2명에게 휘두른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11㎝의 흉기도 나왔다. 경찰은 천씨가 휘발유를 구입한 경로와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가 범행 도구가 맞는지 조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