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야욕 탓에… 12억 명에게 ‘퍼펙트 스톰’ 닥친다

입력
2022.06.10 04:30
17면
유엔 "식량·에너지·금융 위기 심각"
전쟁 계속되면 3억명이 '식량불안'
우크라 흑해 항구 개방 논의 공전
세계 근로자 60%는 실질임금 줄어
"국가위기→정치불안 악순환 우려"

“전 세계 12억 명이 식량과 에너지, 금융 위기라는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위기)’에 직면했다.”

유엔은 8일(현지시간) 공개한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인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며 이같이 분석했다. 전쟁의 상흔은 우크라이나 영토에만 남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단 한 사람의 야욕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지구 인구 5분의 1가량이 수십 년간 배를 곯고,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유엔은 이날 발표한 ‘글로벌 위기대응 보고서’에서 “전쟁이 전 세계 식량ㆍ에너지ㆍ금융 세 가지 위기에 미치는 영향은 날로 심각해진다”며 “94개국 16억 명이 최소 한 가지 위기에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4분의 3인 12억 명은 모든 위기를 피하지 못한 ‘삼중고’에 빠졌다고도 덧붙였다. 곳곳에서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치솟고 일부 국가에서는 부채 부담마저 커지면서 일상이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다.

유엔은 특히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는 식량 위기에 초점을 맞췄다. 심각한 수준의 ‘식량 불안’에 놓인 사람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 1억3,500만 명에서 현재 2억7,600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지구촌을 강타한 감염병에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식량 공급망이 빠르게 무너지고 가격이 치솟은 결과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적절한 식량 섭취가 없으면 생명이나 생계가 즉각적인 위험에 빠지는 상태를 식량 불안으로 본다.

직격탄을 맞은 국가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중남미 개발도상국이다. 이들은 그간 밀 소비량 절반 이상을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해왔지만,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전진기지인 흑해 항구를 막으면서 2,000만 톤 넘는 식량 조달길이 막혔다. 식량난 경고음이 거세지면서 각국은 돌파구 마련을 모색 중이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다. 이날도 터키 앙카라에서 ‘중재자’를 자처한 터키와 러시아 외무장관이 만나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문제를 논의했지만 공전만 거듭했다. 러시아는 항구 개방의 조건으로 △흑해 연안 기뢰 제거 △서방의 제재 완화를 요구했는데, 국제사회로서는 수용하기 힘든 카드인 탓이다.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보고서는 전쟁이 계속될 경우 올해 말쯤에는 식량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3억2,300만 명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쟁이 전례 없는 기아와 빈곤의 물결을 일으키고 사회ㆍ경제적 혼란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당장 빈곤선에 놓이진 않아도, 점점 취약해지는 일반인들의 생계 역시 유엔의 걱정거리다. 수중에 들어오는 임금은 제자리걸음인데, 에너지ㆍ먹거리 등 물가가 끊임없이 오르면서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드는 건 예삿일이 됐다. 일부 국가에서는 전쟁 여파로 국가 경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보고서는 “세계 근로자의 60%가 코로나19 이전보다 실질 임금이 줄었다”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의 경우 러시아로부터 송금이 줄면서 금융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구소련권 국가 노동자들이 러시아에서 송금하는 금액은 이들 국가 국내총생산(GDP)의 10~30%를 차지하는데, 전쟁으로 사실상 중단된 점을 꼬집은 셈이다. 보고서 작성을 이끈 레베카 그린스펀 유엔무역개발회의 사무총장은 “전쟁은 적어도 한 세대 동안 볼 수 없던 세계적인 생계비 위기마저 악화시켰다”며 “글로벌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와 가정의 능력이 약화될 경우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