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위반 교통사고 노인에게 보험급여 5500만 원 환수? 법원이 제동 걸어

입력
2022.06.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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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새벽 신호위반 교통사고 후 사망
건보공단 "중과실" 주장하며 보험급여 환수
"과속, 음주도 아닌데... 중과실 인정 안 돼"
고령자의 신체 능력·기소유예 처분도 고려

신체 능력이 저하된 노인의 신호위반 교통사고 범죄는 중과실이 아니므로 보험급여 환수가 불가능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부장 강동혁)는 A(사망 당시 77세)씨의 유족들이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환수고지 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신호위반 교통사고... "중과실, 5500만 원 가져가겠다"

A씨는 2020년 5월 15일 오전 5시 34분 인천광역시의 한 교차로를 적색신호에 진입해 반대편 차선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움직이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A씨는 이 사고로 전치 3개월 상해를 당해 입원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피해자는 뇌진탕 등으로 전치 4주 상해를 입었다.

건보공단은 A씨의 신호위반 교통사고를 중과실로 판단하고 보험급여 5,500여만 원을 환수하려고 했다.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건보공단은 중과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보험급여를 부당이득금으로 간주하고 환수할 수 있다.

A씨 유족들은 건보공단 처분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다. △A씨가 저지른 교통사고를 중과실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A씨가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보험급여 전부를 반환하도록 하는 건 비례 원칙에 어긋난다는 취지였다.

"과속·음주 없었다... 중과실 아냐"

법원은 이에 대해 유족들 손을 들어줬다. 교통사고가 중과실이 아니므로 보험급여 환수를 취소하라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A씨가 과속했거나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며 "신호를 위반해 교통사고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고의에 가까운 주의를 결여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A씨가 실수로 신호를 위반했을 가능성 또한 유족 측에 힘을 실어준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A씨의 시청각 능력이 황반변성과 중증 난청 등으로 저하돼 있었고 △비가 내리는 새벽 시간이라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판단 착오 등으로 정지신호를 인지하지 못한 채 교차로에 진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검찰도 A씨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고 밝혔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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