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10일 취임사에서 '보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대내적으로는 '정치·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기술 혁신에 기반한 빠른 성장'을 국정 비전으로 제시했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를 전제로 한 한반도 문제 해결'과 '세계 시민을 위한 자유·인권의 가치 수호'를 내걸었다.
자유가 승자독식의 생존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유 시민의 연대'를 강조한 점, 진보 진영의 담론이자 세계적 흐름인 '포용적 성장' 대신 '빠른 성장'을 역설한 점이 눈에 띈다.
약 3,300자 분량의 윤 대통령 취임사를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본다.
윤 대통령은 초저성장, 대규모 실업, 양극화 심화, 사회적 갈등 등으로 인한 공동체 결속력 와해 등 복합 위기를 짚으며 “이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반지성주의”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를 “국가 간 갈등,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극단적 진영 대결이 낳은 맹목적 팬덤 정치와 편가르기, 의회주의의 훼손 등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됐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의 반대 개념을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타협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고 규정했다. 결국, 토론과 숙의의 정치, 여론을 경청하는 통치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가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며 "이 순간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책임을 부여받게 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위기 해결을 위한 해법으로 '자유'를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피었다”며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방치된다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받게 된다”라고 했다.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탐독했다는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자유'를 강조했다.
다만 윤 대통령이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연대’를 꼽은 것은 새로운 부분이다. 윤 대통령은 “자유는 결코 승자독식이 아니다”면서 “어떤 사람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자유 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가 승자독식·적자생존으로 흐르지 않도록 연대를 통해 결과를 보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윤 대통령은 이를 위해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 마지막 문장에서도 “저는 자유, 인권,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만들겠다"며 '연대'를 거듭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의 해법으로 '도약'과 '빠른 성장'을 꼽았다. 윤 대통령은 "빠른 성장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고, 사회 이동성을 제고함으로써 양극화와 갈등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빠른 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의 대안적 개념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도약과 빠른 성장의 방법론에 대해 "오로지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에 의해서만 이뤄낼 수 있다"고 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며 우리의 존엄한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과학ㆍ기술ㆍ혁신을 통한 성장론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부터 강조됐다. 인수위는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를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국제 연대를 통한 성장'도 역설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은 우리나라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며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으로써 과학 기술의 진보와 혁신을 이뤄낸 많은 나라들과 협력하고 연대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취약한 평화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을 꽃피우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면서 "평화는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국제사회와의 연대에 의해 보장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폐기를 거듭 천명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가 모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선결 조건이라는 점도 재확인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 경제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제공할 비핵화 인센티브로 윤 대통령이 '담대한 계획'이라는 표현을 쓴 건 처음이다. 대선 과정에서 윤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가 실현되면 인프라ㆍ투자금융ㆍ산업기술 등을 지원하는 ‘남북 공동경제발전계획’을 공약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의 마지막 부분을 "글로벌 리더 국가로서의 책임론"으로 채웠다. 윤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그룹에 들어가 있다"며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 기반한 보편적 국제규범을 적극 지지하고 수호하는 데 글로벌 리더 국가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시민 모두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 더욱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국제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때 국내 문제도 올바른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