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대선 르포] '2强' 마르코스 vs 로브레도 마지막 유세… 석양의 록 콘서트에 문화축제로 맞서다

입력
2022.05.08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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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진영, 춤추고 노래하며 미리 '승리 자축' 
차분한 로브레도, '필리핀 버전 촛불집회'로 응수 
9일 대선 투표 시작, 마르코스 측 승리 전망 우세


"이틀 뒤면 마르코스는 말라카냥 대통령 궁에 도착한다!"(Two days na lang, nasa Malacañang na si BBM!)


필리핀 17대 대통령선거를 이틀 앞둔 7일 오후, 수도 마닐라는 붉은 옷의 행렬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청년부터 필리핀 명물 '지프니'에 탄 중장년까지, 시민들은 모두 흥분된 표정으로 같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의 행선지는 마닐라만에 위치한 솔레어 리조트 앞 공터. 그곳에는 필리핀의 악명 높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마지막 유세를 위해 지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처럼, 마르코스 후보의 유세장도 온통 붉은 인파로 금세 가득 찼다. 지지자들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승리를 확신하며 들떠 있었고, 이들의 흥은 오후 5시 전후로 성대하게 폭발했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자 등장한 크리스 로렌스 등 필리핀 인기가수들이 영국의 록그룹 퀸의 히트곡들을 열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의 간주 부분마다 마르코스 후보의 애칭인 '봉봉'이 외쳐지지 않았다면, 현장은 영락없는 록 콘서트장이었다.

마르코스 선거 캠프도 지지자들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집중했다. 집권의 당위성에 대한 연설도, 공약에 대한 설명도 없는 무아지경의 록 콘서트는 마르코스 후보가 등장한 밤 10시 30분까지 계속될 뿐이었다. 환호 속에 등장한 후보 본인도 '록 스타'처럼 대중을 선동했다. 그는 "우리는 선거 당일 수많은 인스턴트 커피를 현 부통령 레니 로브레도 후보 캠프로 보내 잠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2016년 16대 대선 당일 밤, 당시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마르코스가 로브레도 후보에게 패배했던 아픈 기억을 돌려주겠다는 취지다.

같은 시간, 마닐라 도심에 위치한 아얄라 거리는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저 많은 인파를 모으기 위해 마닐라만 공터를 택했던 마르코스 측과 달리, 로브레도 선거캠프는 필리핀 민주화의 상징인 아얄라 거리를 마지막 유세장으로 선택했다. 아얄라 거리는 마르코스 후보의 부친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1986년 1차 '피플 파워'가 시작된 역사적 장소다. 로브레도의 분홍은 현 정권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독재정권에 대항했던 구 민주세력을 대표했던 노란색이 혼합돼야 나오는 색깔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짓밟은 민주주의를 되새기고 독재자의 아들이 집권해선 안 된다는 의미를 담은 셈이다.

로브레도 지지자들은 차분했다. 아얄라 거리 모퉁이 곳곳에서 과거 독재정권을 풍자한 행위 예술과 음악 공연이 펼쳐졌고, 분홍 옷을 입은 지지자들은 웃으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밤 9시 로브레도 후보가 중앙 단상에 나타나자 지지자들은 질서정연하게 그의 앞에 모였다. 로브레도 후보는 "어떤 것도 여러분들의 단합된 힘을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이들을 마지막까지 독려했다. 예정된 4시간의 집회가 끝난 뒤, 지지자들은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를 들고 거리를 청소했다. 2016년 한국의 광화문 촛불집회 때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느껴졌다.

승리를 확신하며 흥에 겨운 마르코스 측과, 차분하게 지지를 호소한 로브레도 측의 마지막 유세 현장은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는 지지율 격차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마르코스 후보는 필리핀 여론조사업체 '펄스 아시아'가 2일 공개한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56%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지난해 연말 같은 조사보다 4%포인트가량 상승한 수치다. 2위인 로브레도 후보는 23%로 마르코스 후보 지지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필리핀 외교가 관계자는 8일 "펄스 아시아의 여론조사 표본 수가 1,500명에 불과하지만 대중 선동에 능한 마르코스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건 여전하다"며 "9일 투표에서 부동층이 모두 로브레도 후보 쪽으로 몰려야 마르코스 가문의 재집권이 무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뚜껑을 열어봐야 하지만, 유세 현장 분위기로는 이미 마르코스의 대를 이은 집권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마닐라=글ㆍ사진 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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