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경제학자인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가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때 논문을 썼다는 친구들은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라고 비판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고교 1학년 때 두 달간 단독 논문 5편을 작성했고 같은 기간 전자책 4권을 출판했다'는 허위 스펙 의혹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지난달에도 윤석열 정부 초대 내각 인사에 대해 "대부분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해 온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 많은 천재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2000년대 초 대학입시 제도가 바뀌면서 갑자기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는 이런 천재들이 성장해 학계를 이끈다면 우리 학문의 수준이 세계 최고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학계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신이 서울대에서 가르쳐 온 학생들 중에서도 "이전 세대의 학생들과 비교해 천재스럽다고 느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어떤 학부모로부터 고등학생인 자식이 '경제학원론'을 저술했으니 감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날고 긴다는 서울대 학생도 이해하기 힘들어 애를 먹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며 "일개 고등학생이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저술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라고 되물었다. 제안은 단번에 거부했다고 했다.
반면 자신과 이전 세대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고교시절은커녕 대학생 때도 외국 저널에 논문 한 편 실어보지 못했다며, 논문이 스펙쌓기 수단으로 변질됐음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경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논문 하나 써 본 적이 없다"며 "대학생활을 하면서 논문을 쓴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게 우리 세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전 세대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 역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논문 한 편 써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일이 2000년대 초 수시전형이라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라고 진단했다. 자신이 과거 새 입시제도 도입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강력히 지적했으나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고등학생들이 논문을 썼다고 나서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현재는 논문 집필을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이 바뀌었다고 전하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고등학교 때 논문을 쓰는 천재가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때 논문을 썼다는 친구들은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라며 "어린 학생이 스펙 쌓기의 정신적, 육체적 부담에 시달려 건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밝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늘 말하지만 그런 쓸모없는 짓에 매달리게 하지 말고 아예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인 일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한편 '한겨레'는 4일 한 후보자의 딸이 고교 1학년이었던 지난해 하반기 6편의 논문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 후보자의 딸은 논문 중 3편을 11월, 2편은 2월에 작성했다. 그런데 11월엔 '기하학', '기초 미적분학', '세포 주기와 유사 분열' 등에 관한 4권의 전자책도 출판했다.
한 후보자는 이튿날 즉각 입장문을 내고 "장기간에 걸쳐 직접 작성한 고등학생 수준의 글을 마치 고등학생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의도적인 프레임 씌우기용 왜곡·과장이자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8일 한 후보자의 딸 논문 중 일부를 케냐 출신 대필 작가가 작성했다는 정황을 보도했다. 해당 보도에서 한겨레는 대필 작가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신저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