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E1, 신발 벗어던지고 美치다 ... K팝, 노동권의 '블랙홀'

입력
2022.05.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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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E1 무대로 본 K팝 노동권의 그늘]
"해체 통보" 후 6년 만에 
북미 최대 페스티벌서 다시 모인 2NE1
공민지 "인생의 한 페이지 새로 장식"
"해체, 기사로 알았다"는 2NE1
K팝 활동 '생사여탈권'은 결국 기획사에
일방적 해체 통보, 함부로 쓰지 못하는 이름
대물림된 K팝의 그늘

"내가 제일 잘나가". 지난달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오. 광활한 사막, 조명이 꺼진 무대에서 이 한국어 노래가 울려 퍼지자 객석에선 환호가 터졌다. 매해 20만 명이 찾는 북미 최대 음악 페스티벌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코첼라)'에 2016년 해체한 그룹 투애니원(2NE1)이 깜짝 등장했다. 해체 후 공민지, 박봄, 씨엘(CL), 산다라박 등 네 멤버가 모여 함께 무대를 꾸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 롤링스톤 "2NE1 무대, 코첼라의 명장면"

깜짝 놀란 해외 관객들의 함성이 축포처럼 곳곳에서 터지자, 수줍음 많기로 유명한 산다라박도 흥분했다. "넌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보기 좋게 차여". 그녀는 이 랩에 맞춰 하이킥을 했고, 너무 세게 다리를 올려 찬 바람에 오른쪽 신발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2010년대 초중반 한류를 이끈 2세대 K팝 아이돌은 어느덧 30대 후반이 돼 맨발로 '내가 제일 잘나가'의 춤을 끝까지 췄다. 미국 음악 전문지 롤링스톤은 2NE1의 이 무대를 올해 코첼라 명장면 중 하나로 꼽았다. 공민지는 본보에 "인생의 한 페이지를 새로 장식한 기분"이라며 "오랜만에 관객들 얼굴을 보며 왜 우리가 무대에 서는지, 무대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공민지 스튜디오에 모여 비밀리에 춤 연습

2NE1의 네 멤버는 YG엔터테인먼트를 떠나며 뿔뿔이 흩어져 각자 다른 연예기획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3일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CL이 지난 2월 자신의 생일 때 다른 세 멤버에게 코첼라 무대에 대한 운을 띄웠다. 보안 유지를 위해 일부 멤버는 소속사에도 한동안 이 특급 프로젝트를 함구했다. 2NE1은 공민지의 댄스 스튜디오에 오후 10시 이후 모여 틈틈이 안무를 맞췄다. 공민지는 단발로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늘 파격적이던 전성기 시절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었다. 2NE1의 무대는 애초 코첼라에서 기획되지 않았다. CL이 단독으로 초대받았으나, 이 공연을 기획한 88라이징 측과 협의해 2NE1의 깜짝 무대를 성사시켰다. CL은 "너무 늦기 전에 남이 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힘으로 모여, 우리가 아직 여기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NE1이 깜짝 공연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2NE1의 이 무대에 안팎으로 관심이 쏟아진 데는 그룹의 '비극적 퇴장'과 관련이 깊다. YG가 "멤버들과 오랜 상의 끝에" 2NE1 해체를 결정했다고 2016년 공식 입장을 냈지만, 5년 뒤 멤버들이 밝힌 속사정은 달랐다. CL 등은 "해체 소식을 기사로 접했다"고 밝혔다. 기획사와 소속 가수가 이렇게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충분한 합의 없이 그룹의 해체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렇게 2NE1은 해체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여성 그룹은 남성 그룹에 비해 기획사에서 더 쉽게 방출된다. 팬덤이 얇아 상업성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다. 네 멤버의 연습생 기간은 평균 4년. 이렇게 오래 땀을 흘리며 2009년 데뷔해 세계를 들썩이는 스타가 됐지만, 그룹의 '생사여탈권'은 결국 YG에 있었다. 그들을 기획한 YG가 상표권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한 뒤 회사에 들어가 7년 동안 여러 성과를 냈는데, 사측이 갑자기 청년의 책상을 치우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될까. 산다라박은 2NE1의 해체 소식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풍파를 딛고 다시 모였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하려면 넘어야 할 장애물도 있다. 네 멤버가 2NE1 이름을 앞세워 유료 공연을 하거나 앨범을 내려면, YG에 사전 동의를 얻거나 상표권을 양도받아야 한다. 2NE1의 무대가 코첼라에서 깜짝 이벤트로 기획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이름 바꾸고, 부르지 못하고... 대물림된 K팝의 그늘

겉으론 번쩍이는 K팝 산업은 일부 아이돌그룹엔 노동권의 '블랙홀'이다. 2009년 데뷔한 비스트는 2017년 전 소속사인 큐브엔터테인먼트를 떠난 뒤 '하이라이트'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 소속사와 팀명 사용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비스트란 그룹 이름을 쓰지 못해 벌어진 촌극이다. H.O.T.는 2018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재결합 공연을 열면서 공연 제목에 그룹 이름을 쓰지 못했고, 무대에선 단 한 번도 "H.O.T."를 외치지 않았다. 상표권 침해금지 소송에 휘말려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에 '계약 기간이 종료된 후에는 상표권 등의 권리를 기획사가 가수에게 이전해야 한다'(8조)고 권고했다. ①기획사에서 '좋은 곡'을 만들었다고 해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라지고 ②기획사는 아이돌그룹이 신인일 때 회사에 유리한 수익 분배로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상표권까지 독점하는 건 '이중과세'가 될 수 있다는 취지다. 하지만 계약서엔 '기획사가 상표 개발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하는 등 특별한 기여를 한 경우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어, 기획사가 상표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몽니를 부리면 잡음이 일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표준 계약 7년이 끝나고 그룹 멤버들이 모두 전 소속사를 나간 뒤 3년 이후부터는 상표권 사용료를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김성환 음악평론가는 "저작권료처럼 전 소속사에 상표사용료를 지불하되, 활동한 음반이나 공연 수익 등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는 타협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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