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끝없이 화력을 쏟아붓는 ‘소모전’으로 흐르면서 서방과 러시아가 각각 내세웠던 ‘레드라인(금지선)’이 사라지고 있다. 서방은 확전 위험을 이유로 우크라이나 지원 목록에서 제외했던 전투기 투입 문제를 공론화했고, 러시아에선 ‘전면전’을 선포하고 국가 총동원령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전날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공동 노력의 일환으로 폴란드가 미국제 F-16 전투기로 슬로바키아 영공을 순찰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가 현재 보유 중인 구소련제 미그(Mig)-29 전투기를 우크라이나에 투입하겠다고 명확하게 밝힌 건 아니지만, 영공 방어를 위한 대안이 마련된 만큼 전투기 이전 가능성이 상당히 커졌다고 NYT는 분석했다.
특히 이번 합의는 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회원국이라는 점에서 더욱 예사롭지 않다. 그간 나토는 서방과 러시아 간 직접 충돌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의 전투기 지원 요청을 줄곧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전투기는 러시아 영토로 넘어가 직접 군사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서 러시아도 유독 민감하게 반응했다. 전투기가 서방과 러시아 모두에게 일종의 ‘레드라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이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보내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데 이어 나토 회원국이 전투기 지원 논의에 불을 붙이면서 서방은 사실상 레드라인을 넘고 있다. 앞서 3월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제공하자는 폴란드 측 제안을 극구 만류하던 때와 비교하면 180도 달라진 태도다.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는 러시아 측 반발에도, 오히려 탱크, 곡사포, 자폭 무인기 등 공격용 무기 지원도 대폭 늘렸다.
러시아는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에서 철군하면서 “2차 목표는 동부 돈바스 지역 완전 점령”이라 선언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우크라이나군의 항전에 가로막혀 아직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먼저 공격을 감행한 러시아에는 전략 실패나 다름없는 치욕이다. 영국 국방부는 최근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보급선을 단축하고 지휘ㆍ통제 체계를 단순화해 키이우 전선에서 경험한 실패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여전히 병력 상당수가 사기 저하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교착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벤 윌러스 영국 국방장관은 그 시점을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인 오는 9일로 예측했다. 러시아가 전시체제에 돌입하려면 그간 우크라이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해 온 ‘특수 군사작전’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전면전’을 선포해야 한다. 푸틴 대통령에게 ‘선전포고’는 또 다른 의미의 ‘금기’다. 군사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군과 가까운 소식통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공략 좌절에 격분해 있다”며 “군 수뇌부가 푸틴 대통령에게 특수 군사작전 용어를 폐기하고 전쟁을 선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에 전했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니콜라이 파트루세프 안보위원회 서기도 “러시아엔 자급자족 경제가 필요하다”며 전면적인 전시체제 전환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서방과 러시아가 벼랑 끝 대치를 벌이면서 전쟁은 끝 모를 비극으로 치닫고 있다.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금기를 넘은 전쟁이 초래한 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미국 민간위성업체 맥사가 공개한 위성사진을 보면 우크라이나군의 최후 항전지인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무참히 파괴됐다. 제철소 지하 공간에 갇힌 주민들은 비닐 봉지를 아기 기저귀로 쓸 정도로 생존 위기에 내몰렸다. 팔다리를 잃은 부상자들도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유엔과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제철소 내 주민 대피를 위해 러시아군과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지난달 30일 어린이와 여성 수십 명만이 대피하는 데 그쳤다. NYT는 “탈출한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내 안전한 도시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러시아군에 억류되거나 러시아 도시로 강제 이송됐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