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뜨거운 비명을 들어라

입력
2022.04.30 10:00
19면
<84> 애플TV플러스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올해 초에 나의 첫 소설이 실린 앤솔러지 단편집이 공개됐다. 내 소설 '아날로그 로맨스'를 포함해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장르의 소설 다섯 편이 한 권의 책에 실려있다. 앤솔러지는 우리말로는 '선집'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보통은 원어를 그대로 쓰면서 각기 다른 작가가 쓴 공통의 주제 혹은 장르의 글을 모은 단편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듯하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모았을 때뿐만 아니라 단편 드라마 시리즈에도 앤솔러지라는 단어를 쓴다. 2년 전에 이 지면에 소개했고 벌써 두 번째 시즌까지 공개된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모던 러브' 시리즈가 바로 실제 사연을 모티프로 삼은 현대인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앤솔러지 드라마였다.

앤솔러지는 각기 다른 작가와 창작진이 같은 주제를 두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모두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 매력이다. 그래서 앤솔러지 시리즈를 시작할 때는 보통의 드라마를 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는 게 좋다. 일단 개별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마음을 열어두는 게 좋다. 한 편이 재미없다고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취향일지도 모를 다른 작품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부터 소개할 애플TV플러스의 앤솔러지 드라마 '로어: 세상을 향한 함성'도 마찬가지다. 세실리아 아헌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30~40분 분량의 단편 드라마 여덟 편이 준비돼 있다. 시작해보자. 그런데 직관적으로 주제를 드러냈던 '모던 러브'와는 달리, '로어'는 제목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주제가 뭐라고?


'로어'의 주제는 이 작품의 부제가 두 개라는 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애플TV플러스 메인 화면에서 볼 수 있는 부제는 '세상을 향한 함성'이다. 이 부제로는 도저히 작품의 주제를 떠올릴 수 없다. 누가, 왜 함성을 지르는가? 의문을 품고 재생 버튼을 눌러보자. 소리 높여 '헤이!'를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오고 여러 개의 벌린 입을 지나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화면이 빨려 들어갈 때쯤, '로어: 여성들의 뜨거운 외침'이라는 자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인 '여성들의 뜨거운 외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숨겨져 있는 것, 이 상황이 앤솔러지 드라마의 장르까지 보여준다. 바로 블랙 코미디다. 영미권 페미니스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인 헬렌 레디의 '아이 엠 우먼'의 첫 구절 '나는 여자다, 나의 외침을 들어라'에서 영감을 얻어 '로어'라는 제목을 달았을 때, 이 드라마 시리즈를 설명하며 절대 생략할 수 없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곧 '여자'일 것이다. 하지만 생략돼 버리는 세계에서 이상한 일,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으며 여자들은 살아가고 있다.


'로어'는 이 이상한 일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유나 상징을 말 그대로 눈앞에 펼쳐 놓는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첫 에피소드의 제목은 '사라진 여자'다. 젊은 흑인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쓴 자서전이 출판된 후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완다(이사 레이)는 책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을 받고 로스앤젤레스를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완다를 보지 못하고, 완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다.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더 큰 볼륨으로 소리 높여 외치자는 드라마의 카피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이 에피소드를 맨 앞에 배치한 데는 당연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완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돈으로 산 뒤, 개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VR 체험 영화로 만들려는 백인 남성들과 마주보고 있다. 아무리 완다가 목소리를 높여도, 멈추지 않고 질문해도 그들은 완다의 말을 듣지 못한다. 이런 비현실적인 설정은 완다가 출입증 사진을 찍을 때 피부색으로 인해서 사진이 찍히지 않는 실제하는 차별과 이어지면서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남성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여성이 목소리를 내도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순간을 '투명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고 표현한다면, 이 표현은 그저 비유일까? 여덟 편 중 여섯 편의 줄거리 마지막에는 이런 단어가 덧붙여져 있다. '말 그대로.'


이 표현을 '말 그대로' 밀어붙인 에피소드는 3편 '선반에 진열된 여자'다. 모델로 일하던 아멜리아(베티 길핀)는 부유한 남편 해리(대니얼 대 킴)를 만나 결혼한다. 해리가 선반을 설치해 아멜리아를 앉힌 뒤 아내를 바라보고 숭배하며 지내기를 원하자, 아멜리아는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의 마지막 전시품으로 낙점된 여자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선반 위에 앉아 웃는다. 대사로도 언급되는 것처럼 '트로피 와이프'라는 표현을 있는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트로피'는 단순한 비유일 수 없다. 영화 '라라랜드'를 연상케 하는 유쾌한 뮤지컬 풍으로 연출된 아멜리아의 화려한 외출 후, 아멜리아는 선택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예쁜 아이가 될래, 똑똑한 아이가 될래?" 여자 어린이들만 받게 되는 이 질문의 함정을 아멜리아가 깨닫는 순간, 그 장소가 주는 아이러니도 흥미롭다. 뻔한 길로 갈 수 있었던 결말을 한 번 더 비트는 이 영리한 단편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 감독인 김소용이 연출했다.


앤솔러지 시리즈의 특별한 재미 중 하나는 짧은 러닝 타임의 작품이기에 배우들이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일과 가정 모두에서 완벽하기를 원하는 워킹맘이 말 그대로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잡아먹히는 '몸에서 잇자국을 발견한 여자' 편에서는 전기 영화나 장르 영화에서 돋보였던 신시아 에리보의 생활 연기를 만날 수 있다. 두 여성 형사의 강간 사건 수사를 소재로 한 작품인 넷플릭스의 '말할 수 없는 이야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메릿 위버는 '오리에게 잡아먹힌 여자'에 등장한다. 메릿 위버의 연기는 말하는 수컷 오리를 등장시켜 이성 연애 관계에서의 유해한 남성성을 고발하는 이 독특한 상상력의 작품을 현실에 붙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로어'의 책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며 제작에도 참여한 니콜 키드먼은 '사진을 먹는 여자'로 등장한다. 니콜 키드먼의 고국이기도 한 호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치매에 걸린 엄마와 딸의 관계를 풀어낸 이 이야기는, 다른 에피소드들과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해도 시리즈의 입문용으로 부족함이 없다.


'로어'의 주제를 선명하게 알게 됐고 또 관심이 생겼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숨겨진 '여자'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다. '여성들의 뜨거운 외침'이라는 부제를 숨겨놓은 것이 '로어'라는 시리즈가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는 어떻게 보면 세련되지 않은 방식으로 느껴질 만큼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여자들이 아무리 뜨겁게 외쳐도 세상은 듣지 않는다. 하지만 들릴 때까지 최대 볼륨으로 계속 외칠 것이다. 이 시리즈는 그 외치는 소리의 일부일 뿐이다. '로어'는 은유나 상징으로 표현하면 혹시 이해하지 못할까 봐,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까 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주제를 직접적으로 꺼내 놓는다.


캠핑 중에 살해당한 젊은 여자 리베카(앨리슨 브리)가 영혼이 된 상태로 등장하는 '자신의 살인 사건을 해결한 여자'도 마찬가지다. 수사 중인 남자 형사 듀오를 따라다녀도 범인을 찾는 데 진전이 없자, 리베카는 스스로 수사를 해 범인을 찾아낸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은유적으로 범인을 밝혀보자면, 여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회와 그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의 남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리베카를 죽였다. "누가 열여섯 살 소년에게 여성을 혐오하라고 가르칠까요?" 리베카도, 이 드라마도 하고 싶은 말을 돌려서 할 생각이 없다. 오늘도 세계 어딘가에서 어떤 여자는 여자라서 죽임을 당한다. 여자를 증오하는 세계에 살며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이 여자를 죽인다. 말 그대로.

다시 한번 말해야겠다. 모두에게 적당히 호감을 살 만한 제목이 되기 위해 '세상을 향한 외침' 정도로 머무르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들려오는 여자들의 비명이 너무 크다. '로어'는 그걸 알려주는 작품인데 주제를 제목에서 숨겨 놓았으니 여기 그 소리를 풀어두겠다. 외치니 들어라. 여자들의 뜨거운 비명을. 말 그대로.

윤이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