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는 알지 못하는, 사람 지우는 전쟁 참상 알리고자…"

입력
2022.04.20 18:00
21면
'전쟁일기' 출간, 우크라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
전쟁으로 무너진 평범한 한 사람의 일상 기록
"''승자 없는 전쟁 그만' 메시지 위해 출간"
"매일 첫 일과는 우크라 잔류 남편 안위 확인,
위험 노출 상황 주제 피하려 시답잖은 대화만"

"다행히 삶은 우리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러시아의 침공으로 고향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를 떠나온 지 한 달을 훌쩍 넘긴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36)는 "평범한 일상을 어느 정도 되찾아가고 있다"면서도 인터뷰 내내 눈시울이 촉촉했다.

전쟁은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화가인 남편 세르게이와 아들 표도르(9), 딸 베라(4)와 일구던 행복 대신 지금은 낯선 불가리아 남부 도시 스타라자고라에서 임시 난민 자격으로 두 아이, 강아지 미키와 함께 새 삶을 꾸리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그간의 경력에서 벗어나 그레벤니크가 최근 새로 내놓은 책은 몸소 겪은 전쟁 참상을 담은 '전쟁일기'(이야기장수 발행)다. 전쟁이 발발한 2월 24일부터 8일간의 지하 방공호 생활과 피란 과정 등을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 에세이다. 그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을 통해 국내 출판 브랜드 이야기장수와 연이 닿아 출간됐다.

18일 화상(줌·Zoom)으로 만난 그레벤니크는 "매일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은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남편과 엄마의 안위를 확인하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는 일"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계엄령 선포로 18~60세 남성의 출국이 금지됐다. 남편을 남겨둔 채 아이들과 함께 피란길에 오르는 우크라이나 여성의 모습은 이번 전쟁의 하나의 상징이 됐다. "남편은 르비우에, 엄마는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와 함께 하르키우주에 머물고 있어요. 매일 통화하지만 위험에 노출돼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일부러 일상적 대화만 하고 있어요."

아이들은 어느새 친구도 사귀는 등 새 삶터에 빠르게 적응 중이다. 하지만 전쟁의 충격은 어린 자녀들에게도 강하게 남았다. "딸이 마분지로 컴퓨터게임을 하는 시늉을 하면서 놀고 있었는데, 전쟁에서 사람을 구해 주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꽃잎 떼기' 놀이를 할 때도 주제가 '전쟁이 끝날까, 안 끝날까'였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아이들 팔에 적은 인적사항… "사망 후 식별 위해"

이제는 50일도 더 지난 공습 첫날의 비현실적 느낌과 공포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오전 5시 30분 그레벤니크는 폭격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짐을 싸고, 자신과 두 아이 팔에 인적 사항과 연락처를 적었다. "혹시나 사망 후 식별을 위해서."

그레벤니크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두려운 감정을 잠시나마 덜 수 있어 지하 방공호에서 지내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금세 종식될 거라 믿었기에 스케치가 책이 될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안위를 묻는 팔로어에게 일일이 답하는 대신 그림을 게시했다. "슬프게도 제 비극적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고, 꼭 책으로 출간하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다가 피란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출판사를 구한다는 메시지를 인스타그램에 띄웠죠." 그는 "(전쟁을) 기억할 때마다 상처가 깊어지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비극을 '전쟁일기'를 통해 한국에 알리게 돼 기쁘다"고 했다.


"사람을 민족 소속으로 나누면 안 된다"

책에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 인류애 등 전쟁의 여러 얼굴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레벤니크는 하르키우에서 처음엔 폴란드로, 다시 지금 머물고 있는 불가리아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통하지 않는 폴란드에서 불가리아행 비행기표를 구하는 일은 폴란드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러시아인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도와줬다. 그의 도움으로 인터넷이 아닌 전화로 문의해야 했던 강아지 동반 표를 예약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친구들에게서 외면받은 그 팔로어와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레벤니크는 "그 여성은 러시아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는 데도 많은 폴란드 친구들이 등을 돌렸다고 들었다"며 "지금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인을 증오하고 저주하지만 나는 사람을 민족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피란 과정에서 국적과 민족을 불문하고 여러 도움을 받은 그는 "전쟁이 있고, 사람들은 따로 존재한다는 걸 이제 정확히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될 인류의 비극임을 누구나 알지만 직접 연관된 내 일이 아니면 머릿속 이론에 그칠 뿐이죠. '전쟁일기'는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진 한 개인의 비극과 감정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독자 여러분과 똑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라서 와닿으실 겁니다. 제발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랍니다."


김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