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마감이 끝나면 공연,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 가곤 한다. 크고 작은 목표에 가 닿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좋아하는 공연을 선호하는 자리에서 관람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품이 들기 때문에 그 수고를 되돌려 버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쓰게 되는 효과가 있다. '무사히'라는 부사를 선뜻 쓰기는 어렵지만, 우여곡절을 넘어 그날이 찾아오면,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고 공연 시간보다 이르게 길을 나선다. 집이나 작업 공간에만 머무느라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에 놀라면서 바람을 쐬고 세상을 구경한다. 그날, 그 시간에만 볼 수 있는 공연을 본다. 티켓 금액만큼의 문화생활을 넘어, 좋아하는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멋진 하루를 스스로 선물했다는 기분이 든다.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서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난 뒤, 타인과 나란히 앉아 특정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경험까지도 내게는 공연의 일부다.
아무래도 '일부였다'고 써야 할 것 같다. 팬데믹이 시작된 후에 이 모든 일은 과거형이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완화로 공연이 재개된 뒤에도 움츠러든 마음은 다시 피어나지 않아서, 선뜻 공연장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큰맘 먹고 예매를 시작했는데, 급작스러운 PCR 검사로 한 번, 공연 팀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두 번 강제 취소를 당하고 보니 짜낸 용기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상의 많은 부분이 회복되는 중에도 공연 문화의 정상화가 어려운 이유는 공연자와 관객이 물리적 시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같은 공간 안에서 숨을 나누며 바로 그곳에서 그 순간에만 벌어지는 일을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이 공연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인 이상, 온라인 상영이 공연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공연 실황 영상은 무대를 더욱 그립게 하며, 관객으로 객석에 앉아서 보게 될 날을 기다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디즈니플러스의 '해밀턴'은 어떨까. 2016년 미국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해 11관왕을 달성한, 전무후무한 뮤지컬의 실황 영상이다. 실은 이 작품이 바로 내가 디즈니플러스가 서비스를 시작하기를 고대하고, 바로 가입한 이유였다. 공연에 대한 갈증이 커져만 가던 때, 뮤지컬 '인 더 하이츠'로 주목받은 린 마누엘 미란다를 명실상부한 브로드웨이의 거장급으로 승격시켰다는 '해밀턴'이 궁금했다.
해외 뮤지컬 실황 영상은 대체로 복습 혹은 예습을 위한 콘텐츠라는 느낌으로 보는데, 2014년에 극장 개봉한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라이브'가 영화와 뮤지컬 각각 최소 5회 이상 본 작품을 복습하는 개념이었다면 '해밀턴'은 예습이다. 팬데믹이 끝나면 공연 팀이 한국 투어를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여행을 가서 볼 수도 있으니 그 전에 내용을 숙지하고 노래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뮤지컬 공연도 한 편의 이야기인데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더 재미있다고 주장한다면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해밀턴'은 미국 10달러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 즉 미국 건국의 주역 알렉산더 해밀턴의 일생을 그린 전기 뮤지컬이기 때문에 역사가 스포일러다. 이 뮤지컬의 결론을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은 영화 '사도'를 보러 가기 전에 "사도 세자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외치는 일과 비슷하다.
오히려 역사적 배경지식을 알고 있는 것은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 예습을 영어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데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디즈니플러스 서비스 시작 당시 '해밀턴'에는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지 않았다. 불편을 겪은 소수의 팬이 따로 자막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나는 매달 일정액을 지불하는 구독자인데도 프로그램을 따로 실행해야만 겨우 비공식 자막으로 시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잠시 외면했다. '완다비전'을 정주행하고 몇 편의 영화를 보는 사이, 드디어 공식 한국어 자막이 업로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동으로 인한 수고로움까지도 한 편의 공연을 보는 일에 포함이 되기에 이를 기꺼이 감당하는 과정 또한 선물이 된다면, 내 방에서 내 TV로 리모컨 몇 번을 눌러 시청할 수 있다는 유일한 장점마저도 유예된 이해할 수 없는 경험으로 '해밀턴'이 내게로 왔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독립 전쟁 전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미국 헌법 제정에 공헌한 법률가였고,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시절에 재무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관료이다. 뮤지컬 '해밀턴'은 고아로 자기 삶을 개척해야 했던 해밀턴이 이민자로서 미국을 조국으로 택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를 통과해나가는 일생을 그린다. 고아면서 이민자라는 해밀턴의 정체성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다. 기댈 곳과 가진 것이 없는 한 인간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당시 미국이 바로 해밀턴과 닮았기 때문이다. "어리고 싸움을 좋아하며 굶주린" 세계인 미국에서, 젊고 공격적이며 배고픈 해밀턴이 인생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해방하고, 새로운 나라를 연방주의로 통치하고자 하는 꿈을 품은 것이다.
'인 더 하이츠'로 뉴욕에 사는 라틴계 이민자의 삶을 무대로 옮겼던 린 마누엘 미란다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인생에서 이민자 정체성과 미국을 닮은 기질을 발견한다. 신대륙에 모여든 이민자들의 나라이니 각기 다른 인종, 성별, 기질의 인물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밀턴을 직접 연기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정 출신의 린 마누엘 미란다를 비롯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대부분의 배우가 유색 인종이다. 독립 전쟁의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해밀턴이 친구와 장난스러운 악수를 하며 건네는 "이민자들은 뭐든 해내잖아"라는 말에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갈채는, 지금의 미국 관객이 '해밀턴'을 어떤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해밀턴'을 향한 젊은 세대 중심의 열광적인 팬덤이 생겨난 데에는 음악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베이스가 되는 장르는 바로 힙합이다. '인 더 하이츠'에서 이미 랩과 힙합 문화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미란다는 '해밀턴'에 이르러 근현대 미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악 장르가 힙합임을 뮤지컬 무대 위에서 선포한다. 세상에 할 말이 너무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한 방'은 무대 위에 랩으로 쏟아지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는 랩 배틀이 된다. 후에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제퍼슨(데이브드 딕스)과 해밀턴의 회의 배틀은 자신 있게 말하는데, '쇼 미 더 머니'보다 훨씬 재미있다. 복잡한 무대 장치나 배경, 화려한 앙상블을 동원하지 않고도 '해밀턴'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을 위인이 아닌 한 인간의 이야기로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번역이 쉽지 않은 랩의 뉘앙스까지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국어 자막이 등록되기는 한 지금, '해밀턴'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새롭고 흥미로운 콘텐츠 중 하나다. 앞서 무대를 직접 보는 일회성 콘텐츠로서의 공연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면서 실황 영상이 이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지만, '해밀턴'을 본 이후에는 이를 대체의 개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실황 영상이 '공연의 생생한 감동을 안방에서'와 같은 문구를 통해 홍보되지만, 실황 영상은 물리적 제약이 있는 공연 예술의 복제품도, 보완재도 아니다. 오히려 예습과 복습이라는 표현 그대로, 보조재에 가깝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의 특성상 이런 콘텐츠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공연 예술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독립된 콘텐츠로서 뮤지컬 실황 영상만의 매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매력과 재미를 시청자들이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해밀턴이 총알에 맞는 그 순간 총알을 연기하는 앙상블 배우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아니타를 연기한 아리아나 드보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현재 공연 중인 작품의 생중계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실황 영상의 완성도를 높여 공연의 일부가 되는 방식이 공연 예술의 확장에 더 가까울 것 같다. OTT라는 플랫폼과 공연 예술의 만남이 이 오랜 예술의 형태를 또 어떻게 바꾸어 갈지 지켜보는 일도 흥미롭겠다. 우선 그 전에 '해밀턴'부터 한 번 더 보고, 듣고. 실황 영상은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의 뮤직비디오로서도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