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처벌받지 않고 증발되지 않으려면

입력
2022.04.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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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유산보호 중점 검찰청' 제주지검에 걸린 현판이다.

'걷기'가 유일한 취미인 나는 제주 곳곳을 혼자 걸으며 난개발에 신음하는 현장과 마주치고는 제주를 지키기 위해 검찰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종종 자문해본다. 하지만 작년부터 시행된 검경 간 수사권 조정으로 부동산 투기, 난개발, 환경파괴 사범은 검찰에서 수사할 수 있는 범죄에서 제외되어 있는지라 초동수사조차 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 경찰에서 수사하지 않으면 결국 개인자격으로 경찰에 고발장을 내든지, 기껏 올레길 쓰레기나 주워야 하는 현실에 암담함을 느낀다. 전 국민을 분노케 한 LH 부동산 투기 사건 때에도 검찰은 먼발치에서 경찰수사를 지켜만 볼 뿐 손이 묶인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이제 또 법을 바꿔 그나마 검찰에 남아 있는 6개의 부패, 공직비리, 경제, 대형참사, 방위사업, 선거 사건수사권까지 송두리째 박탈된다고 한다. 젊은 날을 바쳐 수사하고 재판했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배임, 국정농단, 불법대선자금, 성원·오리온·뉴코아·해태그룹 경영비리, 서민을 울린 저축은행 비리 사건은 아예 수사할 꿈도 못 꾸게 된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이 수사도 받지 않고 '증발'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수십, 수백 명의 증인과 수천, 수만 쪽의 회계자료가 등장하고 호화 변호인단을 갖춘 상대방을 이겨내려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자료를 분석한 검사가 초동수사부터 재판까지 모두 헤쳐나가야 하는데 앞으로 어찌 해야 하는 것인지 이젠 자신이 없다.

이른바 '거악이 잠 못 들게 하는' 대형사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전임검사가 1년이나 고민하다 두고 떠난 교통사고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니, 담당 경찰이 살인이라는 의혹을 갖고 수사했지만 입증에 자신이 없어 교통사고로 종결한 사건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재수사를 시작하였고 결국 살인 혐의를 밝혀내 유죄 판결이 났다.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면 살인은 밝혀지지 않고 영원히 교통사고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경찰이 검찰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유능하고 성실한 경찰관은 주변에 많다. 그렇지만 억울한 피해자를 구해주고 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죄 지은 사람을 반드시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한 수사기관이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 한 번 더 증거를 살펴보고 직접 사건 관계인들의 호소를 들어봐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안전망이 2중, 3중으로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25년 동안 검사로 일한 나는 검찰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검찰의 과오와 오판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에 문제가 있으면 그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고쳐 써야지, 내다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해 경찰로, 중대범죄수사청으로, 공수처로 보내고 나서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폐지하고 또 다른 기관을 새로 만드는 실험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법원의 재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헌법을 개정하여 사법부에서 재판권을 박탈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수 있을 듯하여 두렵다.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점은 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스스로 오만했고 살아 있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지적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검찰이 힘 센 사람들에 맞서 현직 대통령 YS·DJ·MB의 아들과 형, 측근들을 구속수사하고, 경찰에서 밝혀내지 못한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댓글조작을 바로잡고, 국정농단 사건을 사법제도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 역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검찰은 물리적 힘은 하나도 없고 법률의 힘만을 믿고 일하는 법률가 조직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법률로써 보호하는 안전망 역할을 가진 법률 장치이다.

일을 제대로 못 하면 더 엄히 꾸짖어 주시되, 검찰이 일은 계속 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란다. 부디 범죄가 처벌받지 않고 '증발'되어 버리지 않도록.


이원석 제주지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