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오늘을 담은 음악의 가치

입력
2022.03.09 04:30
22면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올해,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이 내한한다. 아믈랭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고도프스키처럼 초절기교를 요하는 고난이도 작품을 거뜬히 연주해내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작품을 찾아내 이것을 훌륭하게 연주해냄으로써 좋은 곡을 알리는 데에도 앞장서는 인물이다. 덕분에 그의 음반과 연주, 작품들은 늘 궁금하고 설레고 기대감을 갖게 한다.

아믈랭이 한국에서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역사에 남길만한 역작’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클래식 음반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그라모폰 상을 받은 '쇼팽-고도프스키 연습곡' 앨범이 출시된 2000년이다. 쇼팽의 24개 연습곡을 고도프스키가 53개의 초절기교 연습곡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아믈랭은 2004년 내한무대에서도 이 작품의 일부를 연주했었다. 처음엔 과시한다 싶을만큼 탁월한 테크닉으로 혼을 빼놓았는데 음악회를 마칠 즈음 확인했던 것은 그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이 아니었다. 음악은 무엇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믈랭은 2003년, 미국 작곡가 프레더릭 제프스키의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주제에 의한 36개의 변주곡'을 연주한 앨범을 발표했다.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는 칠레의 폭압정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결집시키며 불렀던 민중가요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저 노래를 테마로 해 36개의 변주곡을 펼쳐낸 후 다시 테마로 돌아오는 구성을 가진 이 곡은 제프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다. 힘 있는 테마곡, 수많은 풍파를 암시하는 36개의 변주곡을 들으면 아프고,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이 곡을 계속 듣게 된다. 음악 역시 다른 예술사조와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역사를 담는데, 자유를 위해 싸웠던 20세기 민중의 목소리는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통해, 연주자들을 통해 지금도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많은 음악가들과 관계자들이 무대 위에서 전쟁을 규탄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지하는 러시아 음악가들은 퇴출 당했고, 여러 음악가들이 우크라이나 출신 작곡가의 작품과 우크라이나 국가를 연주하며 평화와 자유와 가족을 잃은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마음을 모으고 행동하며 연대를 나타내는 이유는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고, 그 나라의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오래된 상처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서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살아온 땅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단결된 마음과 행동 때문에, 그들이 결코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이 즈음 삼일절을 보냈다.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침략과 전쟁의 상처, 꺼지지 않은 전쟁의 불씨와 분단의 현실을 살고 있다. 식민지배나 전쟁은, 비록 약소국이지만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힘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이번 전쟁 역시 그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지키려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아믈랭의 제프스키 음반을 다시 찾아 듣게 된 이유다. 음악이 외치는 것은,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열세인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항쟁과 3·1운동이 전쟁 종식과 독립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든 못했든 간에, 단결된 민중은 그 나라를 달리 기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믈랭은 오는 9월 한국에 온다. 그 사람의 연주력, 장기를 보여주는 수많은 작품들이 있겠지만, 이번 공연에서 제프스키의 곡을 연주해주면 좋겠다. 음악이 외치는 소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누군가를 움직이게 했으면 좋겠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음악이 현재를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면 좋겠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