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푸틴 나팔수' 된 미어샤이머? 혼돈의 국제정치학계

입력
2022.03.04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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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외교부, 미어샤이머 "서방 책임" 주장 인용
현실주의 이론이 푸틴 논리 정당화하게 된 꼴
행위자와 국제기구 역할 과소평가 지적 속
"푸틴 지나친 악마화는 경계해야" 반박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본격화한 이래 여론의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인물 중 하나는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다.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을 대표하는 그의 논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을 서방에 묻고, 심지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부의 트위터 계정은 1일 지난 2014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된 미어샤이머의 "우크라이나 위기는 왜 서구의 책임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공유했다. 내용은 "문제의 근원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의 확대"라면서 "미국과 유럽 동맹들이 이 위기의 대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요약했다. 2014년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돈바스 지역에서 친 러시아 성향 반군 세력이 일어선 시점이다.



자신의 주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쓰이면서 십자포화를 받는 가운데 1일 주간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도 미어샤이머는 "미국이 2008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에 가입시킬 의사를 밝힌 것(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나토의 부쿠레슈티 선언)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해당 선언 이후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전쟁에 개입해 조지아를 굴복시켰고 우크라이나를 향한 압박을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어샤이머의 '공격적 현실주의'는 국제정치를 기본적으로 국가 간 힘과 힘의 대결로 파악하는 관점이지만, 이 때문에 국제정치를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이미 결정된 것'으로 파악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미국 국방 분야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마이크 마자르 선임정치학자는 "미어샤이머의 이론 자체는 유의미하지만 그는 개별적 상황과 행위자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상황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선전 좋지만, 푸틴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은 위험한 도박"



하지만 미어샤이머의 현실주의 이론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제정치학자들은 이제 서구 정가와 언론에서 우크라이나 수호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변하며 러시아를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국가로 '악마화'하려는 경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미국 외교가에서 '푸틴 광인론'의 대표 주자이자, 대 러시아 강경책을 설파하고 있는 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 마이클 맥폴은 2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제 러시아인들은 푸틴 편이냐 아니냐로 갈린다"고 역설했다가 "지나치게 위험한 발언"이라는 주변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고 삭제했다. "악당을 벌해야 한다"는 도덕적 논리가 국제정치 공간에서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쟁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어샤이머와 함께 대표적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2일 야후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의 오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비해 강하기 때문에 섣불리 승리를 낙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유럽과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긴장 완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미국과 나토, 유럽연합(EU) 등이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원책을 쏟아내는 가운데서도 직접 군사 개입은 자제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와 EU 가입을 추진하지 않는 것 역시 현실주의적인 해석에 바탕을 둔 판단이다. 우크라이나로의 군사 진출 자체가 서구 대 러시아의 전면전, 곧 핵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은 2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독재자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며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핵 병력에 고도 경계 태세를 명령할 때 우리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인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