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 '메이플스토리', '크레이지 아케이드', '서든어택', '카트라이더', '던전앤파이터'.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1990~200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중년의 직장인부터 현재 중·고교에 재학 중인 청소년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작품들이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면서 그의 손에서 잉태됐던 히트작이다. 국내 게임업계의 '지존'으로 알려졌던 김정주 넥슨 창업주가 그려낸 대표작이다. 특히 국내 최초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장르인 ‘바람의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PC온라인 게임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작은 오피스텔에서 출발, 넥슨을 연매출 3조 원이란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빚어낸 기록이다.
게임 불모지였던 한국을 온라인게임의 성지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던 그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카이스트 전산학과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당시 김 창업자는 카이스트 기숙사에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같은 방을 썼고, 옆 방에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와 김상범 넥슨 전 최고창조책임자(CCO)가 있었다. 국내 정보기술(IT) 업계의 기틀을 만든 이들이 한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김 창업자는 박사과정 중인 1994년 12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서울 역삼동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송재경 대표와 넥슨을 공동 창업했다. 대학원 공부 중 틈틈이 게임을 만들다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아예 게임회사를 차린 것이다. 김 창업자는 한번 몰두하면 끝을 볼 만큼 열정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김 창업자와 송 대표의 관계는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관계에 비교된다. 워즈니악이 개발을 주도하고 잡스가 사업에 수완을 발휘해 애플의 성공을 이끌었듯, 송 대표가 '바람의 나라' 개발에 매진하고 김 창업자는 투자 자금조달과 경영에 매진했다. 실제 김 창업자와 송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에, 카이스트 대학원까지 인연을 이어온 친구였다.
하지만 창업의 길이 순탄하진 않았다. 국내에선 온라인 게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초기 자금 확보부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IBM으로부터 6,000만 원의 투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착수, 결국 세계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탄생시켰다.
바람의 나라의 역사적인 성공 이후 송 대표는 넥슨을 떠났지만, 김 창업자는 이후에도 탁월한 사업능력으로 게임개발사를 인수,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서든어택' 등의 히트작을 연이어 선보이면서 넥슨을 국내 게임업계 1위 업체로 성장시켰다. '던전앤파이터'로 중국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등 적극적인 해외시장 진출로 K게임의 활로를 뚫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게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항상 한국 게임의 미래 구상에 몰두해 온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05년 넥슨 대표를 맡았지만 1년 만에 사임하고 지주사인 엔엑스씨(NXC) 대표를 16년간 맡아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암호화폐 거래소인 비트스탬프와 한국 최초의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빗 등을 인수했고 스타트업 투자 문화도 선도했다.
2019년 회사 매각 시도가 무산된 뒤부터는 지식재산권(IP) 확장에 집중해왔다. 지난 1월에는 영화 '어벤져스'로 유명한 루소 형제의 AGBO 스튜디오에 4억 달러(4,800억 원) 규모의 전략 투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디즈니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김 창업자의 꿈 때문이었다.
김 창업자는 2015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디즈니가 부러운 건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며 "아이들과 부모들이 스스로 돈을 싸들고 와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며 디즈니 콘텐트를 즐긴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창업자는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3년 아시아 최초의 컴퓨터(PC)박물관인 '넥슨컴퓨터박물관'을 개관했고 같은 해 국내 최초의 아동 재활병원인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지원했다. 2018년부턴 넥슨재단을 설립한 이후, 국내 최초 공공 어린이재활병원과 첫 독립형 어린이 완화 의료센터, 경남권 어린이재활병원 등도 지원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넥슨은 초기 한국 게임산업을 일으킨 기둥인데, 그 중심에 김 창업자가 있었다"고 떠올리면서 "해외시장 진출에 있어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고, 일찍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안정적 기업구조로 국내 IT 업계 지배구조에도 귀감이 됐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