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핵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의 제재가 최고조에 이른 것에 반발, 핵무기 운용부대에 경계 태세 강화를 지시한 데 이어 ‘혈맹’ 벨라루스도 핵무기를 자국으로 들여올 채비를 마쳤다.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현존 최악의 무기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재까지는 서방과 우크라이나를 향한 압박용 엄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맞대응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핵 위협은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27일(현지시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등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서방 국가들이 우호적이지 않은 조처를 하고 있다”며 핵 운용 부대 등 특수부대를 향해 “특별 전투 의무 체제에 도입하라”고 명령했다. 앞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을 장악하고, 수도 키예프와 제2도시 하르키프 주변 원전을 폭격한 것에 이어 핵 무기 사용까지 언급하면서 공포를 극대화시켰다.
28일에는 친러 국가로 우크라이나 접경국인 벨라루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비핵국 지위를 포기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키면서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구 소비에트 연방 구성국이던 벨라루스는 1994년 소련 시대에 배치된 자국 내 핵무기를 러시아에 반환하고 핵 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했지만, 이날 이 원칙을 깨고 러시아 핵무기를 국내에 배치하겠다고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의도를 두고 우선 서방과 우크라이나를 향한 압박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액턴 핵 정책 프로그램 국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현재로서 경계 태세를 높인다는 것이 대륙간탄도탄미사일(ICBM) 등 전략 무기를 뜻하는지, 지역적 전술 무기를 뜻하는지 불확실하다"면서 "전자라면 미국 등 서구에 대한 압박이고 후자라면 협상을 앞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력이 목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ㆍ스위프트)에서 러시아 은행들을 배제시켜 사실상 글로벌 교역을 막는 ‘금융판 핵무기’를 사용한 데 따른 반발이자, 전쟁 상대방인 우크라이나를 옥죄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러시아 국방 전문가인 파벨 펠겐하우어는 BBC방송에서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 금융 시스템을 붕괴시킨다면 푸틴에겐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며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을 중단하거나, 북해에 핵을 터뜨릴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ㆍ벨라루스가 핵 카드를 꺼낸 것 자체가 이번 침공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나왔다. 엘리엇 코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센터장은 이날 알자지라 방송에서 “핵이 등장했다는 건 러시아가 현재 군사작전에서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핵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나토 국가들은 당장은 이 압력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푸틴 대통령에 대응하는 것이 되레 핵 전쟁의 위협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릴 킴벌 미국 군축협회장은 AP통신에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에 핵 무기를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면서 "미국과 유럽이 극도로 자제하면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