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싸우며 강해진 나라...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주목하자

입력
2022.02.27 09:00
키예프 루스로 뿌리 공유하지만 이후 분열
1차-2차 대전 사이 소련에 독립 투쟁 시도
푸틴 "소련에서 만들어진 나라" 주장하지만
러시아 개입이 외려 '우크라이나 정체성' 강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확히는 볼셰비키,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으며 레닌과 그 동료들이 러시아 자신의 역사적 영토를 분할하는 가장 엉성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2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란 국가의 개념을 허구라고 말했다. 그 기원 자체가 소련에 있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주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른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지만,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역사적 맥락 자체는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우크라이나란 국가는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우크라이나라는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엄연히 존재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에 저항하고 소련과 싸우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친서방과 친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본격화한 2014년 이래, 러시아의 개입은 우크라이나를 쪼개기는커녕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러시아'라는 별명

푸틴 대통령의 주장 자체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문화적 기원은 같다. 키예프 루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맹국가는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옛 동슬라브족을 대표하는 국가였다.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국가의 거점은 최초에는 모스크바보다도 북쪽에 있는 노브고로드였으나, 이후에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였고, '루스'라는 이름은 오늘의 러시아가 이어받았다.

키예프 루스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무너진 후, 우크라이나 일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며 모스크바 공국(이후 러시아 차르국, 러시아 제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게 됐다.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은 카자크(코사크로도 불림)라는 기병대가 자치권을 얻어 치안을 유지했다.


우크라이나는 17세기에 주인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로 바꾼다. 주요 카자크 지도자 중 하나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반기를 들고 독립해 카자크 국가를 세운 뒤 러시아 차르국을 끌어들여 폴란드에 맞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카자크의 자치권을 부정하고 간섭을 강화하면서 우크라이나는 결국 '소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됐다. 이때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은 현대 우크라이나 서부 일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변방으로 남았다.


소련에 맞서 태동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가 근대적 '독립 국가'의 모습을 잠시나마 갖추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도중 발생한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과정에서였다.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만들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소련과 싸우면서 탄생한 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의 제헌의회(라다)는 독립을 선언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때 우크라이나 의회에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이민자 공동체가 모여 있었다. 제정이 무너진 자리에 수립된 러시아의 임시 정부는 이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이 정부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다시 한 번 뒤집히면서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정권을 대상으로 독립 전쟁을 치른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내의 볼셰비키를 앞세웠고(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남은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에 의지했다. 그러나 동맹국이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후 처리에서 독립 보장을 받지 못하고 소련과 폴란드 등 주변국에 의해 분할됐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이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이자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편에 서서 민족국가로서 독립을 노렸다. 하지만 폴란드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동부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인정해 민족주의적 독립 시도는 결국 좌절됐다.


소련 내부로 편입됐지만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이 과정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인정받게 됐다. 1920년대에는 소련의 소수민족 국가 정체성을 존중하는 '토착화' 정책 덕택에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문화가 부흥했다. 이 정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1930년대 후반부터 독재 정권을 굳히고 '러시아화'를 채택하면서 무너졌지만 이 시점에 이미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소러시아'가 아니었다.

더구나 스탈린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착취했다. 대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진 1932, 1933년 '홀로도모르(대기근)'는 스탈린 정권의 잘못된 농업 정책과 농민 수탈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소 전쟁 도중 우크라이나로 진군해 온 나치 독일이 해방군으로까지 환영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치군이 우크라이나 농장과 산업 시설을 파괴하고,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저지르면서, 나치에 영합한 일부 극우 무장군단을 빼고는 우크라이나인은 독일에 동조하지 않게 됐다.


'소련 내부 존속' 원했던 우크라이나, '푸틴 러시아'는 거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 밖의 주권국가로 독립했다. 독립 우크라이나 자체는 결코 반(反) 소련, 혹은 반 러시아 성향으로 보기 힘들었다. 애초에 발트 3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련 내 자치적 국가로 존속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보수주의자 쿠데타와 이에 맞선 보리스 옐친의 대두로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도 자연스레 소련 내 다른 국가처럼 독립하게 됐다.

독립 이후로도 우크라이나는 친(親) 러시아와 친 서방 정권이 엇갈려 집권하면서 기본적으로 양측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3년 유로마이단 집회, 뒤이은 푸틴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과 돈바스 전쟁 등을 거치면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주의 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우크라이나 싱크탱크 라줌코프센터가 2016년 발표한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7%가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적 정체성과 관계없이 우크라이나 시민 모두"라고 정의했다.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가 우크라이나 국가를 구성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는 2007년 조사 대비 16.9%포인트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주권 자체를 무시하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대외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조슈아 터커 뉴욕대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만들려는 의도"라며 "군사 개입이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반응을 보면, 푸틴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독립성을 좌절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경하게 저항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인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