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활발히 공론화되어야 할 시기인데도 늘 그랬듯 먹고사는 문제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므로 얼마 전 감상했던 오페라의 가사가 유독 또렷이 귀에 박혀 여전히 공명한다. ‘시상 천지가 전쟁판인디 노래를 허겠다고? 아따 험한 세상 재미지게 나네. 이 숭학헌 세상에 악극을 한다고?’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대극장에 독특하게도 창작 오페라가 무대에 올랐다. 단 이틀에 불과했지만 연극과 무용공연에 주력해온 극장의 성향을 고려하자면 독특한 사건이었다. 오페라의 제목은 ‘장총’,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를 일컫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창작 신작을 발굴하기 위해 공모한 사업에서 오페라 부분에 유일하게 선정된 작품이었다. 창작 오페라가 탄생하기 위해선 공적지원이 절실한데도 딱 한 편, 그것도 단 이틀만 무대에 올라 서운한 마음 없지 않았지만 막상 대학로에 오페라의 현수막이 걸리니 반갑고 흥미로웠다.
김은성이 대본을 맡고 안효영이 곡을 지은 이 오페라는 특이하게도 나무와 장총이 의인화되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스토리텔링의 상당부분을 사람 아닌 이들이 이끌어 간 덕분에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입체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전달되었다. 장총은 본디 백두산 압록강변의 졸참나무였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되고 싶었으나 일제강점기 격동 속에서 살상의 무기로 태어나 버린다. 일본 황실의 국화문양이 새겨진 장총 한 자루는 전쟁의 흥망에 따라 일본군에서 독립군, 팔로군에서 광복군, 미군정에서 의용대를 거쳐 오페라의 시점인 1953년 한국전쟁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주인이 사살당할 때마다 적진의 새 주인을 만나는 비극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무참히 짓밟힌 나무의 꿈을 토로하는 아리아가 심금을 울린다. ‘내가 악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왜 하모니카나 바이올린이 아니라 총으로 만들어진 걸까.’
이 오페라의 주인공인 길남은 빨치산의 시신에서 장총을 낚아채며 ‘멸공툉일, 북진툉일, 다 갈겨불랑께 죽여불랑께’란 아리아를 부른다. 부모를 죽인 빨갱이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인격의 파탄에 이른 극우파 청년이지만 전쟁 전엔 하모니카를 즐겨 부르며 음악선생님을 꿈꾸었으니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삶에 내몰린 장총과도 처지가 같다. 그런데 길남이 살던 지리산 기슭에 유랑극단이 도착하며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남매가 운영하는 악단은 전쟁통에도 공연을 멈추지 않고 호객을 위해 쇠붙이 가재도구를 땜질해 왔다. 길남은 방아쇠가 실종된 장총의 수리를 이들에게 맡기고 악극단은 금관악기인 호른의 밸브를 장총에 땜질해준다. 악기로 태어나고 싶었으나 살상의 무기가 되어 고통받던 나무가 드디어 신체의 일부로 악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시점부터 오페라의 스토리는 극적 전환을 맞이해 길남의 불행은 치유의 돌파구를 찾게 된다.
오페라 장총은 전쟁의 비극과 사회적 갈등을 불식시킬 평화의 매개로 호른과 하모니카 등의 악기를 스토리에 효과적으로 이입시켰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음악적 장치들을 적극 활용했는데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이나 쇼팽의 연습곡 ‘이별의 노래’, 한국의 근대가요 등 친숙한 선율에서 모티브를 취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감상의 몰입도를 높여 주었다. 작곡가 안효영은 우리말의 강세를 고유의 리듬으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데, 그 고심이 결실을 맺은 듯 레시타티보나 아리아의 가사들이 자막 없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게 전달되었다. 단 두 번 무대에 오르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이제 막 태어난 창작 오페라가 우리 시대 우리 땅의 현실을 충실히 담아낸 고전으로 오래도록 생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대선을 앞둔 혼돈의 시기, 예술이 갖는 의미와 역할이 응당한 울림을 갖게 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