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 감옥에 가야 하는 대선

입력
2022.02.17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강 건너 여의도로 전해 오는 삼청동 공기에서 초조함이 느껴진다. “대선에서 지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걱정이 청와대 공무원들 사이에 팽배하다고 한다. 청와대 근무 경력이 있는 여당 인사 중에도 비슷한 걱정을 하는 이들이 꽤 된다. 관가에 ‘순장조’라는 표현이 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보좌하는 청와대 공무원은 다음 정권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뜻으로, 살아 있는 신하를 왕의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고대 사회의 순장(殉葬) 풍습에 빗댄 말이다. 이 으스스한 표현이 더는 비유처럼 들리지 않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얼마 전 “집권하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수사를 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전·현직 청와대 공무원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사실로 확인해준 셈이다. 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입장 표명은 임기 말 청와대가 이 문제로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를 보여줬다.

떳떳하면 물론 그만이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전직 청와대 공무원들은 직권남용죄 적용이 걱정된다고 했다.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킬 때 생기는 죄이다. 청와대는 국정과제 이행을 위해 정부 유관기관 인사나 정책에 관여하는 행위를 수시로 한다. 그런데 새 정부 수사기관이 적폐 청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이런 업무 관계에 직권남용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품은 우려이다.

새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들여다볼 직권남용 의혹은 쌓여 있다. 법무부 통계를 보면 현 정부 들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직권남용 혐의로 고소·고발된 건수만 5만3,147건에 이른다. 박근혜 정부 때보다 연간 기준 2~4배 많은 건수라고 한다. 위법 사례가 늘어서라기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수사로 직권남용죄가 유명해졌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청와대 공무원들은 내놓고 불만을 말하기도 어렵다. ‘걸면 걸리는’ 이런 직권남용죄의 잠재력을 최대 한도로 활용한 것이 현 정부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적폐 청산 수사 당시 직권남용죄를 잘 드는 칼처럼 썼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사법농단 사건 관련자 대다수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때는 시원하다는 박수 갈채가 나왔지만 지금은 평가가 엇갈린다. 뇌물 같은 부패 범죄를 찾지 못하자 꿩 대신 닭 격으로 직권남용을 무리하게 적용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나온다. 실제 사법농단 등 적잖은 사건에서 잇단 무죄 판결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직권남용죄를 적극 이용해 수사한 사람이 바로 검찰 재직 당시의 윤석열 후보였다. 청와대 입장에서 볼 때 ‘부메랑을 맞는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반전의 짜릿함은 잠시,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무원들이 감옥에 갈 걱정을 해야 하는 나라가, 글로벌 스탠더드까지 끌어오지 않더라도 정상일까. 몇 달 뒤면 새 정부 사람들이 청와대를 채울 것이다. 그들은 5년 뒤 같은 걱정에 밤잠 설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누가 대통령이 되든 산뜻한 출발을 위해 공무원 부패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적폐 청산이라며 다시 직권남용죄만 파고든다면 그건 또 하나의 부메랑 날리기가 될 것이다.

이성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