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독립 파키스탄의 최대 불운은 '국부'로 존경받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이른 사망이었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가 한결같이 견지한 세속적 의회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했고, 리더십의 빈자리를 꿰찬 건 민족주의를 앞세운 이슬람 근본주의 권력이었다. 의회는 샤리아법을 최상위 법으로 명시한 제헌헌법을 제정했고, 초대 대통령은 독립 직후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계엄령으로 짓밟았고, 사회 불안을 빌미로 군부 쿠데타 권력이 집권했다. '서파키스탄'에 포진한 근본-국수주의자들은 인도 대륙을 사이에 두고 양분된 무슬림 영토 '동파키스탄'에 대한 억압의 불가피함을 들어 권력의 불의를 정당화했다.
지리적으로 분단된 동·서 파키스탄은 무슬림이란 공통점을 제외하면 언어와 문화 등 많은 면에서 이질적이었다. 독립 당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 무슬림은 약 4,400만 명으로 파키스탄 총인구(6,900만 명)의 64%를 차지했지만, 정치·경제 권력은 서피카스탄에 집중돼 있었다. 서파키스탄 의회는 1947년 자신들의 언어인 우르두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선포, 교육과 미디어, 화폐 등에서 동파키스탄인들의 언어인 벵골어를 철저히 배제했다.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중심도시 다카(Dhaka, 현 방글라데시 수도)를 중심으로 격한 저항운동에 나섰다. 그들의 구호는 '벵골어 수호'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형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독립 선언이었다. 1952년 2월 21일 다카대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 과정에 다수의 학생이 진압 경찰에 의해 숨졌다. 1956년 서파키스탄 의회는 제2국어로 벵골어를 채택했지만 무력 투쟁을 동반한 자치·독립운동은 이미 가열됐고, 유혈 진압과 내전(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와중에 인도가 동파키스탄 편에 서서 전쟁(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벌여 승리, 1971년 '벵골 국가'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방글라데시는 국경일인 2월 21일을 '벵골어의 날'로, 유네스코는 1999년 그날을 '국제 모국어의 날'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