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비핵화

입력
2022.01.20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러시아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핵과 묘한 인연이 있는 나라다. 옛소련 시절인 1986년 북부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 폭발은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로 꼽힌다. 수도 키예프에서 불과 100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이 참사 이후 우크라이나가 원전 건설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에너지난을 감당 못 해 다시 원전 건설에 나섰고 지금은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원전에 의지한다.

□ 체르노빌 사고 5년 뒤에는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에 있는 핵무기가 주목받았다. SS-19, SS-24 등 사거리 1만㎞가 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이에 장착하는 550kt급 수소폭탄 등 당시 우크라이나 보유 핵폭탄은 1,240발에 이르렀다. 당시 보유량 기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핵 비확산을 명분으로 미국과 러시아 등 기존 핵 보유국들은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도록 압박했다.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도 비슷한 처지였다.

□ 두 나라는 순순히 응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망설였다. 동부와 남부의 러시아 위협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핵은 가졌지만 운용 시스템이나 유지·보수 능력이 없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쐐기를 박은 것이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다. 미국, 러시아, 영국, 우크라이나 정상이 서명하고 뒤에 중국, 프랑스도 동의한 이 각서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이전하면 독립과 주권을 보장하고 무력행사나 위협, 경제 제재를 하지 않는다는 안전보장 약속이었다.

□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 약속은 이미 공수표가 됐지만 러시아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략한다면 휴지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가 간 약속을 짓밟는 러시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훼손될 위협 앞에서 고작 러시아를 향해 "본 적 없는 제재에 직면할 것"이라는 미국도 딱하다. 핵 폐기의 대가로 주어진 국제적 안전보장이 이처럼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것이라면 비핵화 협상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까.

김범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