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면 다냐?" 사망한 환자의 아들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입력
2022.01.25 17:00
25면
<48> 정문기 비뇨기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응급실 장면 하나

초저녁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들로 응급실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였다. 어느덧 새벽 세 시. 레지던트들은 모두 숙소로 사라졌고, 전쟁터 뒷마무리는 인턴인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난 응급실의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졸음으로 또 근심으로 정지된 그림처럼 앉아 있는 환자보호자들, 나지막이 단조롭게 삑삑거리는 기계들, 그 시간 응급실 풍경은 희미하게 정지된 오래된 흑백 사진과도 같았다.

그때 쌕쌕거리는 가쁜 숨소리와 불안스럽게 쉭쉭거리는 산소 튜브 소리에 신경이 쓰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바로 맞은편 침대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초저녁 엄마 등에 업혀 왔던 어린 소녀가 있었다. 선천성 심장병으로 온몸과 얼굴이 퉁퉁 부었고, 입술과 피부는 시퍼렇게 변해 있었으며, 누우면 숨쉬기가 더 어려워 앉은 채로 고스란히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아이의 엄마가 내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애가 자꾸 환타를 마시고 싶다 하는데요.”

차트를 보니 'NPO'(모든 음식물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심장 기능이 극도로 나빠져 있는데 물을 마시면 심장에 더 부담이 가서 안 됩니다.”

난 아이에게도 말했다.

“지금은 숨이 너무 가빠서 환타 마실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곧 입원하면 좋아질 거니까 그때 많이 마셔.”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 애와 눈이 다시 마주쳤는데 입술이 꼼지락 꼼지락, 눈빛이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난 아이에게 다가가, 쌕쌕거리며 힘들게 새어 나오는 말소리에 귀를 곤두세워 들어봤다.

“환타, 좀 주세요.”

“조금만 더 참아. 곧 날이 밝으면 입원실로 올라갈 수 있어.”

얼마 후 당직실에서 세수를 하며 인수인계 준비를 하던 나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다. 뛰어나가 보니, 그 아이는 앉은 채로 숨을 거둔 상태였다. 옆에서 졸고 있던 엄마조차 모르는 사이에.

허탈감이 몰려왔다. 대체 난 뭘 위해서, 밤새도록 그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음료수 한 모금 못 마시게 했단 말인가.

20년이 흘렀다. 지금도 가끔 환자들이 묻곤 한다.

“교수님, 술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됩니까?”

“몸에 안 좋습니다.”

아, 오하아몽(吳下阿蒙)이여!

※오하아몽: 오나라에 있을 때의 아몽 그대로란 뜻.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진보되지 않은 자나 학문이 보잘것없는 인물을 가리킨다.

# 응급실 장면 둘

부산에 대학병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던 1980년대 초, 응급실은 날이면 날마다 초저녁부터 시장바닥이 되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침대에 누울 수 있으면 특실, 바닥에 종이박스 깔고 누우면 1등실, 바깥 복도에 신문지라도 깔고 누우면 3등실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특실부터 3등실까지 이미 다 찬 상태였다. 그러나 ‘응급환자는 몰려다닌다’는 징크스대로, 심각한 상태의 환자 한 명이 업힌 채 또 들어왔다. 가장 위급한 환자였기 때문에, 의료진 대부분이 그에게로 몰렸다.

인공호흡관 꽂고, 혈관 찾아 링거 달고, 산소줄 꽂고, 오줌줄 달고, 이 약 저 약 투약에, 심장 마사지에, 인공호흡까지. 인턴인 나는 환자 배 위에서 주로 심장마시지를 했던 것 같다. 여러 사람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를 살리지는 못했다. 난 각종 카테터 뽑아 내고 기울 곳은 바늘로 기우면서 뒷정리를 했다.

그때였다. 대학생쯤 될까. 눈 주위에는 눈물 자국도 마르지 않은 청년이 내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XX놈아, 의사면 다가? 니는 너거 애비도 없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어이없어 대꾸도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에게 그는 계속 퍼부었다.

“니는 너거 애비 누워 있을 때 그 위로 넘어다니나? 니가 뭔데 우리 아버지 위로 넘어 다니노?”

“내가 언제 넘어 다녔소?”

“내가 보니까 한두 번도 아니데. 계속 타고 넘데?”

억울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경황이 없었던 터라 진짜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설령 타고 넘었다손 치더라도 환자 살려보겠다고 북새통 속에서 정신없이 긴박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던 것 아니겠는가.

젊은 혈기에 나도 맞받아 고함을 질렀다. 다른 보호자가 와서 그 사람을 떼어 놓았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울음 섞인 음성과 증오의 눈빛으로 계속 나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평생 니 이름 안 까묵을끼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봤다. 사실 인턴인 내 머릿속에는 호흡, 혈압, Bivon, Calcose 같은 의학과 약물용어만 가득해 있었다. 아무리 응급실이란 특수환경이라 해도 환자에 대한 예우와 존중, 보호자들이 느낄 감정 같은 건 내 마음속에 끼어들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혹시라도 그날 그 청년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꼭 말하고 싶다.

“당신 아버지를 타고 넘었던 나의 큰 실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