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사라진 젠더 감수성을 찾아서 (12월 9일자)
독자님, 안녕하세요. 5개월 전 허스토리가 보내드린 뉴스레터를 기억하시나요? 더불어민주당이 대선 경선 예비후보들이 성평등실천서약을 했다는 소식과 함께 앞으로 허스토리가 대선 레이스를 '젠더 렌즈'로 지켜보겠다고 약속했었죠.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성평등 민주주의 구현' '모든 영역에서 실질적인 성평등 대책 수립'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여성이 안전한 사회' 등 당시 민주당 서약서에 등장했던 문구들은 이번 대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을까요?
기대와 달리 현재까지는 성평등 원칙이 무너진 장면을 더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 양당의 대선 주자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남초 커뮤니티의 글을 공유하는가 하면, 성범죄 무고죄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기 때문이죠. 이제 대선까지 100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허스토리는 지금까지 대선 경선 및 정치권에서 일어난 일들을 젠더 관점에서 톺아봅니다.
장면 1. 유력 대선 주자들의 젠더 감수성
① '문제는 페미니즘'이라는 인식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달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글을 두 차례 공유했습니다. "페미니즘을 깨야 그 속에 숨어있는 청년문제가 보인다"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추면 이재명 후보를 기쁜 마음으로 찍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글이었죠. 유력 대선 주자가 특정 성별에 적의를 드러내는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공유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이 후보는 '청년들의 절규를 전하고 싶었다', '그 글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최소한 외면은 말자는 차원'이었다는 취지로 해명했습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예비후보 시절 페미니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는데요. 저출생 이야기를 하던 윤 후보는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이 돼서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를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페미니즘 탓에 이성교제가 이뤄지지 않고 저출생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으로 읽혔습니다. (당시 발언에 대해서는 8월 12일자 뉴스레터에서 자세하게 짚어보았어요.)
② 여가부가 남성을 차별한다는 인식
두 후보가 생각하는 '청년'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런 인식은 여성가족부를 향한 시각에서도 드러났어요. 이 후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 되는 것처럼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옳지 않다"며 여가부를 '평등가족부'나 '성평등가족부'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등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며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여성만을 위해 존재하는 부처가 아니며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이 성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과 운동인데, 여가부와 페미니즘이 '남성을 차별한다'는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죠.
③ 젠더 폭력과 성범죄를 바라보는 방식
남성이 차별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용어에 느끼는 억울함을 대변해준 두 대선 후보는 끊이지 않는 성범죄와 교제살인에 대해서는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요? 우선 이 후보는 과거 조카의 중범죄를 변호한 데 대해 사과했다가 오히려 비판을 받았습니다. 헤어지자는 여자친구와 어머니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을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로 축소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유족들에게 사과를 남긴 이 대표의 말이 진심으로 여겨지려면 교제 살인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언급하고, 이러한 젠더 폭력 범죄에 대한 근절 의지와 강력한 대책을 표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윤 후보는 청년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청년층 관점에서 공정한 법 집행이 이뤄지지 않는 대표 분야'로 성범죄를 꼽으며 성폭력특별법에 무고 조항을 신설하겠다고 내걸었어요. 성범죄 사건에서 억울한 남성이 많다는 일부 커뮤니티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조항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신고가 어려운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위축시키며 2차 가해를 용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2019년 기준 피해자 중 무고로 기소된 비율이 0.78%에 불과했는데요. 무고죄 신설보다 성폭력 근절 방안을 더 힘주어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 번지수 잘못 짚은 두 아재 후보들 칼럼 읽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11708510000376)
장면 2. 여성 비하 넘쳐 나는 선대위
대선 후보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각 당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도 여성을 향한 차별 발언이 난무했는데요. '주요' 인사들이 보여준 낮은 젠더 감수성 사례들 함께 볼까요?
김병준 국민의힘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은 1일 조동연 전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을 두고 "전투복 위의 예쁜 브로치" "액세서리 느낌"이라고 비하했습니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지난달 페이스북에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된 이수정 경기대 교수와 조 전 위원장 사진을 나란히 올리고 '차이는?'이라며 외모 비교를 암시했다가 비판이 일자 게시물을 삭제한 뒤 민주당 선대위에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물러났습니다. 한준호 민주당 의원은 두 대선 후보의 배우자를 두고 "두 아이 엄마 김혜경 vs 토리 엄마 김건희"라고 썼다가 사과했습니다. 국민의힘은 과거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자식을 두 명 낳은 여자는 예외로 할 수 있다" 등의 발언을 한 피부과전문의 함익병씨를 공동선대위원장을 내정했다가 하루 만에 철회했습니다. (→저질 '여성 비하' 난무하는 대선 관련 기사 읽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20215520005380)
장면 3. 여성 대상 공격이 힘을 얻는 정치
여성을 향한 차별과 비하 발언은 대놓고 여성을 공격하는 행태로 확장하기도 합니다. 여성 정치인의 사생활을 공격의 빌미로 삼아 과도하게 인권을 침해하고, 남성 정치인을 비방하기 위해 그의 배우자를 공격하는 이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요. 최근 사생활 논란 끝에 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한 조동연 서경대 군사학과 교수의 사례는 인권 침해로 치달은 폭로전 그 자체였습니다.
한국일보는 이번 사안을 두고 '보여주기 식 인재영입'이 인사 검증에도, 보호에도 실패했다고 진단했습니다. 민주당이 조 교수의 사정을 사전에 알았고, 그것이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그를 영입하지 말아야 했고, 그럼에도 영입했다면 '개인사는 선대위원장 자질과 무관하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당의 검증 책임이나 조 교수의 사정과는 별개로 그의 가족 신상을 공개하고 2차 가해에 나선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의 행태는 악질적이었습니다. (→관련 기사 읽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120316450002778)
이보다 앞서 지난 7월에는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를 폄하하는 벽화가 논란이었습니다. 벽화에는 김씨의 사생활과 관련해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이 담겼고, 이는 한 여성의 인격을 조리돌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조차 "부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는 해당 개인에게도 비극이며, 민주주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 같은 공격의 해악을 짚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장면은?
여러 인사들의 실언과 부족한 젠더 감수성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래서 ‘뽑을 사람이 없다'는 말로 고개를 돌려버린다면 이런 장면을 바꾸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 대선 후보가 다 싫어서 절망하는 당신에게 칼럼 읽어보기) 살펴보면 이런 정치권의 풍경 속에서도 후보들은 정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투표장에 들어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후보들의 정책을 지켜보도록 해요. 엄존하는 여성 차별에 눈 감지 않고, 젠더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후보가 누구인지를요. 대선 후보를 검증하고, 성평등 사회를 원하는 이들의 표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우리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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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 8개월 동안 허스토리 뉴스레터를 번갈아 발송했던 양진하 기자입니다. 독자님과 뉴스레터로 소통해 온 지 어느덧 네 번째 계절을 맞이했어요. 그동안 분노, 슬픔, 절망을 자아내는 기사들도 참 많았는데요. 그래도 뉴스레터를 발송할 때만큼은 기쁜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독자님과 같은 고민을 하며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어요.
갑자기 이런 소감문을 보내는 이유는 오늘이 에디터로서 제가 보내는 마지막 뉴스레터이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뉴스레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뉴스레터를 시작하기 전, 작은 바람이 있었는데요. 기사를 쓴 기자의 마음까지 독자에게 전달되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구독자님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피드백을 받아보면서, 저 역시도 구독자님들과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여성의 이야기'를 위해 고른 책은 '여자들의 사회'(휴머니스트)입니다. '여자들은 이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웃고 울고 싸우고 경쟁하고 좌절하고 끝내 낙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요. 이 이야기가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졌어요. 앞으로도 허스토리에 많은 응원과 애정을 보내주세요! 우리들의 계속될 이야기를 기대하며 이번 주 뉴스레터를 마감합니다.
※ 본 뉴스레터는 2021년 12월 9일 출고된 지난 메일입니다. 기사 출고 시점과 일부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허스토리'를 즉시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한국일보에서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