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륵드륵, 드르륵, 드르륵…'
지난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5가 삼양마크사. 재봉틀(미싱) 앞에 앉은 주인 김동복(64)씨가 톱니를 조절하고 노란색 실을 실걸이에 걸었다. 이어 검은색 패치를 잡은 두 손이 미싱 미끄럼판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능숙한 손놀림에 패치에는 한자(漢字)가 하나씩 새겨졌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두세 번 정도 1초씩 멈추는가 싶더니 어느새 패치 위엔 '大韓民國(대한민국)'이 나타났다.
순간, 31년 전 일이 떠올랐다. 군대 이등병 때였다. "야, (군장점에) 가서 명찰하고 계급장 오바로크 좀 쳐와." 선임병의 이 생경한 명령에 나도 모르게 "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뭐? 네~에?" 선임병의 짧은 되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얼차려'가 떨어졌다. 선임병은 "그것도 모르냐"고 갈구면서도 무슨 뜻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바로크? 이것도 군대 용어인가? 내가 뭘 잘못했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시 후, 군장점 아저씨의 현란한 '미싱질'을 보고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오바로크'는 마름질한 옷감의 가장자리가 풀리지 않도록 실로 박음질하는 봉제 방식을 일컫는 '오버로크(overlock)'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라는 아저씨의 설명 덕분이었다. 군복이나 운동복, 교복에 이름이나 문양을 새길 때 쓰는 '오바로크'는 이처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물론 최근엔 특정 집단이나 소수자를 향해 혐오 발언과 조롱을 쏟아내는 이들의 입을 꿰매고 싶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비판 용어로 소환된 셈이다.
그러나 43년째 삼양마크사를 운영 중인 김씨에게 '오바로크'는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다. "'똥구녁(똥구멍의 전라도 사투리)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그저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고 수단이었죠." 안경 너머 주름진 그의 두 눈이 잠시 감겼다. 그 시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싱을 잡고 오바로크를 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농사꾼 집안의 9남매 중 여섯째였던 그가 미싱을 잡기 시작한 건 고교 1학년 때인 1974년이다.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마산의 야간 고교로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낮이면 고향 선배 밑에서 자수(刺繡)일을 배웠고, 저녁이면 학교에서 책을 팠다.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당시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 탓에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기술이라도 배워 놓으면 밥은 굶지 않는다." 그 시절 자주 들었던 금언도 그가 '오바로크 인생'을 결심하게 된 데 일조했다.
김씨는 1979년 군 전역 후 충장로에 다섯 평 남짓한 가게를 열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교복에 '오바로크' 자수를 한 명찰을 달아주던 "명찰집"이었다. 스물세 살의 어린 그가 미싱 1대를 장사 밑천으로 삼아 돈벌이에 나서자 동종 업계 업자들의 선망과 질시가 동시에 쏟아졌다. 특출한 그의 실력 때문이었다. "젊은 친구가 미싱 기술이 아주 좋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고객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죠. 그때 충장로에 20여 개 마크사가 있었는데, 이 업체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뻔하죠. (웃음)"
김씨의 명찰집은 1980~90년대 최대 호황을 누렸다. 그의 재봉틀 박음질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원숙해질 뿐만 아니라 완성도까지 갖추면서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밀려드는 주문에 집에도 못 가고 가게에서 사나흘씩 날을 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땐 도시나 시골이나 마을 단위 체육대회가 많았는데, 추리닝에 이름 박고 동네 팀 마크도 붙여달라는 단체 주문이 쏟아졌죠. 우승한 동네에선 덤으로 우승기 제작까지 맡겼어요. 전남 진도와 완도 등 섬마을은 물론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왔죠."
일감이 늘어난 만큼 그의 '오바로크' 실력도 정비례했다. 지금까지도 동료 '오바로크' 업자들이 자신들이 주문받은 작업 물량을 김씨에게 제작을 의뢰할 정도니 그 기술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다. 한때 미국과 캐나다에 나가 있는 태권도사범들이 김씨 실력을 인정해 태권도복에 마크와 이름 등을 새겨달라고 해외 주문을 넣기도 했다. 그런 그의 기술 중 최고 난도로 꼽히는 한자(漢字) 새기기는 단연 으뜸이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자와 그 획순을 모르면 한자 박음질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천자문까지 뗐다고 했다. 김씨는 "광주에선 미싱으로 한자를 쓸 수 있는 '오바로크쟁이'는 나밖에 없다"고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이처럼 그는 특별한 마케팅이나 그럴싸한 경영이론 없이 실력 하나로 꾸준히 단골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업계에서 삼양마크사는 "명찰집 중의 명찰집", "업자들이 알아주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 김씨는 "오바로크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글씨체나 박음질 상태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며 "누가 뭐래도 우직하게 기술 본위의 영업을 해 온 것이 세월을 이기고 생존해 온 비결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최고의 '오바로크' 기술을 선보이겠다는 집념에 더해, 고객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성실함은 또 다른 성공 비결이다. 그는 지금껏 납품 기일을 지키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고객과 소통하면서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죠."
하지만 "실력과 성실로 버텼다"던 김씨도 손과 발이 아닌 기계로 하는 컴퓨터 자수 기술이 대세로 굳어진 시대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김씨는 컴퓨터 자수펀칭 프로그램을 도입해 경쟁해 봤지만 전문기업들을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그러니 일거리가 하나둘씩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였다. "디지털 기술이 자수 시장을 잠식하면서 현재 광주엔 마크사 5곳만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죠. 최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덮치면서 일감도 더 떨어졌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죠. 그래도 미싱(바늘)에 손 찔릴 일이 줄어서 좋아요." 그의 얼굴에서 한동안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오바로크' 치는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건 "나를 찾는 고객들을 위해 더 오래된 가게로 남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얼마 전에 제 또래쯤 되는 고객이 고등학교 때 저한테 오바로크를 맡겼었다면서 수십 년 만에 주문하러 찾아왔더라구요. 어릴 때 명찰을 파갔던 꼬마가 직업군인(중령)이 돼서 군복에 오바로크 치러 오기도 하구요. 손님들이 가게가 없어지지만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작은 사명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니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요." 그가 직접 기술을 가르쳤던 처남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물론 여기엔 오직 손기술로 일가를 이뤘다는 자부심도 적지 않다. 김씨는 "40년 넘게 손으로 오바로크를 쳤다. 그것은 자존심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인터뷰 말미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손님을 대하는 진심만은 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미싱은 계속 돌아갈 겁니다." 노포의 묵직한 내공과 존재 가치를 말해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