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 안 했다고, 이젠 지웠다고... 디지털 성착취물 '헐거운 단죄'

입력
2021.12.0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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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 이후 n번방 방지법 1년 넘어
처벌강화 내세웠지만 '솜방망이' 여전
"디지털 시대 '성적 인격권' 침해 중요"

2019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처음 알려진 지 2년여가 지났다. 주범 조주빈에게 징역 42년형 등 관련자들 대부분이 기록적인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난해엔 'n번방 방지법'이란 이름 아래 처벌이 더 강화된 제도적 변화도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집행유예 등 가벼운 형이 선고되고 있다. 세상은 급격히 디지털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데 반해 물리적 성범죄보다 디지털 성착취물 문제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풍토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인식 변화가 없다면 n번방 방지법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리란 우려다.

감형, 감형, 감형… 디지털 성착취 80%가 '집행유예'

8일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와 권인숙 더불어민주당·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은 n번방 방지법 현황 점검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솜방망이 처벌' 문제를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n번방 방지법의 핵심 중 하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다. 수익 목적으로 촬영물을 유포했을 경우 '7년 이하 징역'에서 '3년 이상 유기 징역'으로 처벌을 강화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소지나 시청만 해도 1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그런제 실제 적용은 잘 되지 않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조은호 변호사가 올 상반기 개정 성폭력처벌법이 적용된 대법원 판결 329건(무작위 추출)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징역형은 70%(229건)에 이르렀으나 이 가운데 80%에 달하는 182건이 집행유예다. 같은 기간 판결 중 개정 전 법이 적용된 289건(징역형 74%·집행유예 76%)과 비교하면 징역형 자체도 줄고, 집행유예는 더 늘어난 셈이다. 엄히 처벌한다고 했는데 그렇다.

이유는 너무 쉬운 감형 때문이다. 찍긴 했지만 유포는 안 했다고, 이젠 지웠다고, 반성하고 태권도 사범을 그만뒀다고, 방사선과 다니는 대학생이라고, 초범이라고 줄줄이 감형했다. 이 가운데엔 돈 주고 산 아동·성착취물만 1만 개 넘는 피고인도 있었다. 조 변호사는 "조주빈 등 일당에게 징역 42년, 34년 등이 선고된 것은 이례적인 판결이기보다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새로운 기준이 돼야 하는데도, 법원은 여전히 피고인 관점에서 감형해 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수사 창구 단일화 문제로 풀어야

사건 창구 단일화 문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지적됐다. 디지털 성착취물 때문에 신고하려면, 일선 경찰에서는 여성청소년수사팀과 사이버수사팀이 서로 미루는 경우도 생긴다. 증거 확보 시기를 놓칠 위험이 클 뿐 아니라 피해자 진술이 허공에 뜰 위험도 크다.

신고, 수사과정을 통합적으로 살펴보고 지원해야 할 여성가족부 산하 피해자지원센터 같은 곳은 인력구조가 대부분 기간제여서 전문성·지속성이 떨어진다. 노선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런 과정에서 또 한번 상처받게 되고 결국 수사도 잘 안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으로는 신체적 성폭력만 중시하던 과거 인식 자체가 변해야 한다. 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위원은 "오프라인 세계에서 성범죄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여긴다면, 디지털 세계에서의 유포와 시청, 소지 등은 성적 인격권 침해로 간주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맹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