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8일. 한국여성의전화 후원 계좌에 1,000만원이 입금됐다. 이 단체는 여성폭력 생존자 지원 및 관련 법·제도 개선 활동 등을 한다. 기부금 후원은 늘 반가운 일이지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대뜸 입금된 고액 기부금에 의심과 긴장의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한국여성의전화 측은 25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런 사실을 밝히면서 "갑자기 입금된 고액의 후원은 다른 목적인 경우가 있어 먼저 후원 이유를 확인한다"라고 설명했다. 여성폭력 가해자가 재판에서의 '감형'을 위해 돈을 보내는 사례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후원 목적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그런 경우였다. 한국여성의전화는 후원금을 전액 반환했다.
여성단체는 여성폭력 가해자의 기부를 전혀 받지 않을뿐더러 목적이 불분명한 돈은 돌려주고 있는데도 수년째 이런 일은 반복되는 모양새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수치화하긴 어렵지만 매달 이런 식의 후원이 들어와 반환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015~2017년 가해자 측으로부터 후원이나 기부 제안을 받았거나 기부금을 실제로 낸 사례만 100건이 넘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기부했는데도 감형이 되지 않았다고 이를 돌려달라는 가해자도 있었다는 것.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재판부는 피고인이 제출한 기부금 영수증 등 관련 기록만 있으면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면서 감형을 해준다. 성범죄 전문 지식을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도 '기부 명세서를 준비하라'는 조언이 오갈 정도다. 충북 청주의 한 찜질방에서 7세 여아를 성추행한 A(35)에게 2018년 청주지법 형사11부 소병진 부장판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면서 "한국피해자지원협회에 200만원을 기부한 점 등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참작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여성단체는 후원·기부가 '진정한 반성'이 아닌 만큼 이를 감형요소로 인정하지 말라는 목소리를 꾸준히 높여왔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도 "성폭력 피고인들의 ‘꼼수 기부’가 성행하고 있다”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양형위원회는 “양형 기준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권고적 기준"이라면서 손을 놓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최근 여성폭력 사건에서 기부를 양형의 감경 요소로 반영하지 말라는 취지의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링크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e0tJIUj_XnmkK44AE7uIVtad480rT4GxuYsEBboHA1LlAyww/viewform )
이들은 "결국 문제는 여성단체에 대한 기부를 가해자의 반성으로 인정하고 양형 기준의 감경 요소로 반영하는 법원"이라면서 "피해자의 피해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성평등한 세상을 위한 여성단체의 활동을 저해하는 기부가 가해자의 감형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