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세월을 넘어선 노배우의 투혼… 현실의 그와 닮았다

입력
2021.11.29 04:30
21면
국립정동극장 연극 '더 드레서' 1월 1일까지 공연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1942년 영국의 어느 지방 극장에서 한 노배우(송승환 분)가 227번째 '리어왕'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장 바깥에서는 포탄이 떨어지며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건만 노배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연에 문제가 생겼다. 전쟁 때문이 아니다. 수없이 무대를 누빈 베테랑 배우도 세월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 공연 시작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리어왕의 첫 대사('프랑스 왕과 버건디 공을 모셔오게')가 생각나지 않아 쩔쩔맨다. 노배우의 의상 담당자인 노먼(오만석·김다현)을 제외하고 다른 스태프들은 "공연을 취소해야 한다"며 우려한다.

지난 16일 서울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는 실제로 극장 의상담당자 일을 했던 극작가 로널드 하우스의 희곡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극중 극 형태로, 셰익스피어 연극 '리어왕'을 공연하는 극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더 드레서'는 여러모로 시의성이 짙은 작품이다. 우선 극중 노배우와 이 역할을 맡은 배우 송승환은 닮은 면이 있다. 송승환은 시각장애 4급으로, 시야가 30㎝에 불과하다. 대본이 잘 보이지 않아 모든 대사를 들어서 외웠다. 대본에 쓰인 글자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극에서도 노배우는 기억력의 한계 탓에 대사를 쉬이 떠올리지 못한다. 노먼이 수차례 도와준 덕분에 겨우 무대 위에서 입을 뗀다. 배우인 그의 아내조차 "그만하면 됐다"며 은퇴를 종용하지만, 노배우는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노배우를 이해하고 있을 송승환의 연기는 그래서 애틋하다.

극중 공연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은 전쟁이다. 배우들이 무대로 입장하는 찰나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포탄이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사람들이 쓰러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배우는 비장하게 외친다. "감히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너희의 잔인함으로부터 지켜줄 방패가 되리라!"

팬데믹의 시대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며 자연스레 코로나19와 전쟁 중인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목숨이 오가는 가운데 그깟 연극이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 '더 드레서' 속 배우들에게 공연은 숭고한 본령이다. 객석 안내를 할 사람이 없어서 의상 담당자가 대신하고, 배우가 무대 뒤에서 막노동도 한다. 열악하지만 오직 공연을 올리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오늘날 공연계를 보는 듯하다.

주인공은 노배우인 선생님이지만,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캐릭터는 노먼이다. 이 역할에 함께 캐스팅된 오만석, 김다현 배우의 연기 색깔 차이에 따라 '더 드레서'의 작품 해석도 달라진다.

공연계 실무 경험이 있는 작가가 쓴 희곡답게 공연 준비과정이 현실감 있게 묘사됐다.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무대도 눈길을 끈다. 공연은 내년 1월 1일까지.

장재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