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서 심판해주십시오."
2002년 4월 6일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인천 경선. 노무현 후보는 절규했습니다. 노 후보 장인의 좌익활동을 고리로 색깔론 공세에 나선 이인제 후보를 향한 정면 돌파.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 이 한마디는 변방의 비주류,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노풍(盧風)'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대선후보의 배우자가 대선판에 전면 등장한 첫 사례라는 평가도 나왔죠.
'배우자 대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이번 대선은 후보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 유독 남다릅니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만큼이나 각 후보의 배우자인 김혜경, 김건희씨에 관한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모습인데요. 후보와 선거 유세, 봉사활동 현장에 동행하며 나란히 사진 찍히는 '조연'을 넘어 후보와 함께 대선판을 뒤흔드는 '공동 주연'으로 전면에 등판한 겁니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여론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고 있죠.
공격하는 쪽에선 후보만큼이나 후보 배우자 때리기에 힘을 쏟고, 방어하는 쪽에선 후보만큼이나 후보 배우자 보호에 앞장서는 상황. 전문가들은 이렇듯 '배우자 대선'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으로 비호감 대선을 꼽습니다. 성에 차는 후보는 없고, 정책 비전은 사라졌고, 네거티브만 판을 치며 진영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다 보니, 공격의 화살이 배우자에게까지 쏠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의 배우자 역할에 국민적 기대가 커진 측면도 무시할 수 없어 보입니다.
최고 통치권자의 아내를 우리는 관례상 영부인(令夫人), 퍼스트레이디로 불러왔죠. 역대 퍼스트레이디 유형은 다양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 내조를 선보인 은둔형의 퍼스트레이디가 있었다면,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시민'의 한 사람이자, 최후의 참모로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더 나아가 국정 운영의 비전까지 제시하는 참여형 퍼스트레이디도 국내외 가리지 않고 있었죠. 최근 대통령의 배우자가 더 많은 '공적 역할'을 수행해주길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추세인데요.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일보가 실시한 퍼스트레이디 관련 설문조사 결과 역시 이처럼 달라진 여론을 뒷받침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유권자의 90%가 대통령을 뽑을 때 배우자도 중요한 선택 요인이라고 응답했고, 지지하는 후보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철회하겠다는 사람도 절반을 넘었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3200434115603)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이 확대돼야 한다고 보는 의견도 33.1%로, 축소해야 한다는 응답(11.4%)보다 높았는데요. 대통령 배우자에 대해 공적 책무를 다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고민하는 '공인'이란 인식이 더 뚜렷해지고 있다는 얘기죠.
그러나 한국에서 배우자 정치를 구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 정치를 뒷받침할 법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우리 헌법에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이나 책임, 보수에 대한 규정이 없습니다. 선출되지도 임명되지도 않은 권력이다 보니, 권한과 역할도 모호하고 관리도 비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거죠.
"역대 영부인들이 추진했던 관심 사업은 대통령 특수활동비나 사업 관할부처의 예산,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구매 파트 예산 등에서 그때그때 편성해 수행하는 편"(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낸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보니, 역대 정부마다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은 '재량'에 맡겨두는 셈이었죠.
반면 미국은 퍼스트레이디에게 사업 예산과 직원을 배정하도록 법으로 정해놨습니다.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책무가 있고, 수행해야 할 공적 역할이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됐죠.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는 재임 기간 시대적 과제를 하나씩 정해, 독자적 캠페인으로 추진해오는 전통이 있는데요. 일종의 '영부인 사업'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약 퇴치 캠페인으로 꼽히는 '아니라고 말하라'(Just say no) 운동에 앞장섰던 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였죠. 남편과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걸 다 지켜봤던 바버라 부시 여사는 30년 넘게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서 '문해의 영부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호흡하며 저마다의 지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국내외 퍼스트레이디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사실상 최초의 인물이었죠. 앞서 설문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가장 선호하는 퍼스트레이디 유형으로 '대통령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사회의 음지와 소외 계층을 찾아 돌보는 국모형(83.4%)'을 꼽았는데요. 아마도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서슬 퍼런 유신 독재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압 통치를 희석시키기 위해서였을까요. 따뜻한 성품의 육 여사는 여성 아동 장애인 등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챙기는 데 더욱 힘썼는데요. 특히 한센병 환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를 베풀거나, 한센인 마을을 직접 방문한 것은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혐오가 만연하던 시절,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했죠.
육 여사는 또 청와대 내 야당을 자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야당 성향의 방송이었던 동아방송을 끼고 살았다거나, 청와대로 쏟아지는 각종 민원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어머니는 꼭 알려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버지가 역정을 내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아들 박지만씨가 밝혔을 정도로, 육 여사는 쓴소리를 뚝심 있게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육 여사의 '배우자 정치'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최초로 퍼스트레이디 비서실을 공식화한 육 여사는 양지회와 육영재단 등 본인이 직접 만든 사회자선단체를 통해 소외계층 지원에 적극 나섰는데요. 이 단체 활동에 야당 의원들의 부인은 배제하고 나서 정치적으로 '부인용 통치기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 2019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애도를 표하며 남긴 말입니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이희호 여사의 한평생은 '퍼스트레이디'라는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자신의 일생만으로도 민주화 투사이자, 여성운동계의 거목으로 기록되기에 손색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죠.
대통령 후보 배우자 시절에도 이 여사는 DJ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이 여사가 유세 연설에 나서자, 비서진들이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해 만류를 했더니 이 여사는 "지금은 여성이 마이크를 들어야 하는 시대"(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이석현 의원의 회고)라고 받아 쳤을 만큼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드러내려 애썼죠.
청와대 입성 이후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로서의 전문성을 발휘, 여성 권익 향상을 추동하는 정책의 기반을 닦아 나갔죠. 국민의정부 시절, 여성 장차관 및 청와대 여성 비서관 수가 크게 늘고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여성가족부가 만들어진 것은 이 여사의 노력이 녹아 든 결과였습니다.
1998년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고,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 여사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거란 말이 나왔죠. 대통령 부인을 부르는 명칭이 '영부인' 대신 '여사'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라고 하는데요. "대통령의 부인이기 전에 '나 자신'이고 나이도 들었으니 여사로 불러주면 좋겠다"는 이 여사의 건의 덕분이었죠.
활동 반경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국 퍼스트레이디로는 처음으로 단독 해외 순방을 했고, 대통령과 북한을 동행 방문한 것도 최초 기록이었습니다. 다만 정치적 부침도 없지는 않았는데요, 1999년 옷 로비 사건 의혹에 휘말리며 활동이 다소 위축됐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늘 자신의 삶을 설명할 때, 이 여사를 앞세웠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정치적 동반자이자, 민주화 동지, 여성 운동가에게 보내는 찬사이자 예우였겠죠.
대통령과 별개로 독자적으로 정치활동을 펼치며 사회적 영향력을 끼쳤던 '슈퍼 퍼스트레이디'의 원조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아내였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성운동가로 알려졌던 엘리너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연구하면서, 루스벨트의 대표 공약이었던 '뉴딜정책'을 입안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죠.
백악관 입성 후에 엘리너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에만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여성 및 흑인 등 소수자의 인권 개선에 힘쓰며 본인만의 정치적 어젠다를 놓지 않았죠. 그 결과 백악관 생활이 끝난 이후 정치적 영향력은 더 높아졌는데요. 퇴임 이후엔 유엔 인권대사를 지내며 세계인권선언문 작성도 주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로 지금껏 꼽혀 오고 있습니다.
'슈퍼 퍼스트레이디'의 계보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으로 이어집니다. 2008년, 2016년 두 번 대선 도전에 나선 힐러리 전 장관은 백악관 시절부터 '빌러리(빌+힐러리)'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대통령에 버금가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치인이었는데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 윙에 자신의 사무실을 나란히 만든 건 꽤 상징적인 조치였죠.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2년 대선 유세 당시 '나를 찍으면 대통령감 하나를 공짜로 더 얻는다'는 이른바 '투 포 원 프라이스(two for one price)' 홍보 문구를 내세웠던 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죠. 두 번의 대선 실패에도 명시적으로 정계 은퇴를 언급하지 않은 힐러리. 퍼스트레이디가 아닌 대통령으로 백악관 입성을 꿈꾸는 그의 정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죠.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는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커 호불호가 갈리는 힐러리 전 장관과 달리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 여성의 워너비로 등극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교육, 빈곤, 여성 및 흑인 인권 문제를 비롯해 아동 비만 퇴치 운동인 '렛츠 무브' 캠페인 등 엘리너 루스벨트 못지않게 다양한 사회적 과제에 목소리를 내왔죠. 역동적이면서 기품 넘치는 정치 연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요. 정계 입문설은 부인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도 힐러리 전 장관처럼 독자 정치 행보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퍼스트레이디."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가 운영하는 국립 미국사 박물관이 2011년 개최한 퍼스트레이디 전시회 소개 문구였는데요. 박물관은 역대 퍼스트레이디가 추진한 관심사업, 외교 활동, 패션 등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며, 영부인들의 역사는 그 시대 여성의 삶을 반영하고, 여성 역할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짚었죠.
'시대와 호흡하는 퍼스트레이디.'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 배우자 정치의 핵심이 아닐까요. 대선 후보 배우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함께우리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이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