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의 부동산 실책 때문에 이재명 후보가 손쓰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선거다. 돌파구를 찾자면, 이 후보가 예전 국민의힘 우세 지역이었던 성남시에서 어떻게 시장에 당선됐는지를 떠올려 봤으면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은사인 이상돈 중앙대 법대 명예교수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한 조언이다. 이 후보가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시장으로 당선된 성남시는 가난한 서민 지역과 부유층 지역이 공존하는 도시로 한국의 근대화 성장의 압축판과 같은 곳이다. 2006년 지방선거 때부터 이 지역에 출마한 이 후보는 2014년 선거 때는 마침내 ‘제2의 강남’으로 불리는 보수 성향의 분당구에서도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따돌리는 저력을 보였다. 보수 유권자들까지 이 후보를 지지하고 기대를 걸었던 그때와 같은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최근 각종 기관의 여론조사마다 편차가 크긴 하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정권 교체 여론에 힘입어 초반 고지를 선점한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절반 이상을 상회하는 정권 교체 여론에다 전통적 우군이었던 젊은 세대들까지 민주당에 등을 돌려 선거 구도 측면만 보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해보나 마나 선거”라거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2007년 대선의 재판이 될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도 없는 게 아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선거의 3대 요소인 ‘구도, 인물, 이슈(공약)’ 중 인물과 이슈 측면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한 혁신과 변화의 정치적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달 초 이재명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된 이후 한 달 반가량의 캠페인을 복기해보면 이 후보가 윤 후보에게 크게 밀린 게 비단 윤 후보의 컨벤션 효과 때문만으로 볼 수 없다. 이 후보가 대장동 개발사업 비리 의혹의 늪에 빠져 벗어나지 못해 인물 경쟁력에서 큰 타격을 받았고, 음식점 총량제·주 4일제·국토보유세 등 설익은 진보 정책을 남발해 ‘매운맛 버전의 문재인 정책’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구도뿐만 아니라 인물이나 이슈 측면에서도 윤 후보보다 나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 후보 캠프에선 무늬만 공룡인 선대위가 후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으나, 선대위 문제만이 아니라 이 후보 스스로가 확장성이 거의 없는 캠페인을 해왔다는 얘기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 후보가 민주당 지지자들의 표심이 중요했던 경선 후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다. 축구로 치면 왼쪽 그라운드에서만 드리블하기 바빴다"고 말했다.
최근 이 후보가 전 국민 재난지원금 철회를 계기로 선거 캠페인의 일대 전환을 시도하고 나선 것도 이런 문제에 대한 반성과 무관치 않다. 선대위 개편 추진과 동시에 사과 모드로 몸을 바짝 낮추면서 민생 행보와 실용 개혁을 강조해 민주당을 이탈한 중도층 공략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은 것이다. 이 후보가 23일 대선 후보 선출 후 첫 공약으로 디지털 전환 투자를 통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기본소득 대신 공정 성장을 전면에 내세우긴 했으나 현재로선 국토보유세 공약 등이 뒤엉켜 있어 정책적 혼선 가능성은 여전하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최근 눈물과 진정성 강조로 스타일의 변화를 기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인데, 이게 오래갈 수는 없다”며 “기조 변화의 방향을 명확하게 잡고 이를 구현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 후보가 더 과감하게 왼쪽 우물에서 벗어나 실용 개혁의 면모를 부각시켜야 하다는 주문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 후보에게 “이제 탁구 선수가 아니라 야구 선수 같은 정치를 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이 후보가 탁구 선수처럼 혼자서 모든 이슈를 치고받고 싸울 게 아니라 야구 선수처럼 때론 공을 거르는 선구안과 팀 플레이로 호흡과 강약을 조절해야 한다는 뜻이다.
‘탁구 정치' 비유는 이 후보의 만기친람형 리더십과도 직결된 문제다. SNS를 통해 온갖 사안에 대한 메시지를 내며 치고받는 이 후보 특유의 이슈 파이팅은 민주당 비주류로서 변방의 야전에서 거의 개인기로 정치적으로 성장해왔던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캠프에선 각종 이슈를 직접 챙기면서 디테일에 강한 이 후보의 경쟁력이 향후 TV 토론에서 빛을 발할 것이라는 기대도 상당하다. 최근 윤석열 후보가 연설 무대에서 프롬프터가 작동하지 않아 2분가량 침묵해 구설수에 오른 것과 대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선이란 큰 판에서, 그것도 구조적으로 열세인 판을 개인기로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만기친람형의 탁구 정치는 후보에 대한 직언과 견제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독선이나 편향, 아니면 즉흥성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캠프 내에 정책을 총괄 조율하는 인사가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선거 캠페인에서 ‘의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오히려 후보 혼자 뛰는 듯한 모습이 문제다. 캠프 안의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우려를 담고 있다.
이 후보 캠프엔 2인자 그룹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얘기도 많다. 문고리 권력이나 측근 정치의 폐해가 없는 장점이 있지만 만기친람 리더십과 맞물려 이 후보가 모든 리스크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단점도 상존한다.
이 때문에 이 후보의 돌파력을 살리면서 만기친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선 정책적 역량을 가진 인물들을 전진 배치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선거 캠페인 측면에서도 인재 영입은 이 후보의 약점을 보완해 중도층을 흡수할 수 있는 카드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를 영입해 실용외교위원장을 맡긴 것은 그나마 이 후보가 공들인 성과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 후보에게 거부감을 가진 유권자들도 주변 인물을 통해 지지 명분을 가질 수 있다”며 “노(老) 정객이 아니라 정책적 균형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인사들을 선대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나 민주당도 이를 모르지 않는 모습이다. 이 후보는 23일 언론 인터뷰에서 “외부 인사, 신선한 인재를 영입하는 게 중요한 데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고 추천을 당부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40대 여성 전문가나 경제인, 2030 청년 세대에서 인재 찾기에 주력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해찬 전 대표나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을 배치한다고 해서 중도 확장이 필요한 대선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새로운 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민주당의 정치적 자산이 고갈돼 왔다는 뜻으로 어쩌면 한계에 직면한 신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성향이 그간 40~50대 강성 지지층 위주로 재편돼 진영주의를 강화하고 젊은 세대와도 단절된 것이 결국 마땅한 인재 카드를 찾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졌다는 진단이다. 민주당 내에서 다양성이 소멸되고 후속 세대를 양산하지 못한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 후보나 민주당이 원하는 대선판은 세력 구도가 아니라 후보 간 인물 대결이다. 하지만 인물 대결만으로 대선이 좌우되지 않는 것도 엄연한 정치 현실이다. 이 후보가 개인기의 '탁구 정치'가 아니라 9명의 선수들이 골고루, 빈틈없이 활약하는 '야구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