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반(反)인종차별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쏴 2명을 숨지게 한 10대 백인이 무죄 평결을 받자 미 전역에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법 체계가 망가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던 가운데, 일각에서는 그와 반대로 '정의가 실현된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갈수록 이념적 양극화 추세가 뚜렷해지는 미국 사회에서 이번 평결은 분열을 심화하는 또 하나의 촉매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19일 오후(현지시간) 뉴욕주(州) 브루클린, 일리노이주 시카고,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등 미국 곳곳에서 카일 리튼하우스(18)에 대한 무죄 평결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브루클린에서는 시위대 수백 명이 미국 프로농구(NBA)팀 브루클린 네츠의 홈구장 카블레이스 센터 앞에 모였다. 200명가량의 시위대는 '자본주의 법정에 정의는 없다'는 문구를 적은 팻말 등을 들고 맨해튼브리지를 향해 행진했다. 시카고에서도 도심 밀레니엄 공원 인근에 모인 시위대 수십 명이 교차로를 점거해 경찰과 대치한 후 연방청사 앞 광장에서 거리 시위에 나섰다. 콜럼버스에 위치한 오하이오 주의사당 앞에 모인 시위대는 "지옥 같은 시스템 전체가 유죄다" "살인마 소년을 감옥으로 보내라"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날 위스콘신주 커노샤 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배심원단이 리튼하우스에게 내린 무죄 평결이 전국적 시위를 촉발했다. 리튼하우스는 지난해 8월 커노샤에서 흑인 남성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의 총격에 반신불수가 된 사건을 계기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자, 백인 자경단원과 함께 순찰하던 중 시위 참가자 2명을 총격 살해하고 1명을 다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총기 소유 권리와 자경단의 역할, 정당방위의 정의 등을 둘러싼 거센 논쟁을 일으켰고, 이날 재판도 큰 관심을 받았다.
배심원단은 26시간의 숙의 끝에 결국 '무죄 입장'을 폈던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자신을 때리거나 소총을 빼앗으려고 하는 등 먼저 공격해 온 시위자들한테 위협을 느꼈고,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그들을 쐈다는 게 리튼하우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리튼하우스의 정당방위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에 반발했다. 앞서 검찰은 리튼하우스가 탄두를 금속으로 코팅해 목표물을 관통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풀 메탈 재킷' 탄환 30발, AR-15 스타일의 반자동소총을 미리 준비한 점 등을 강조하며 그가 폭력적 충돌을 유발한 '난폭한 자경단원'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평결의 파장이 상당할 것이라는 점은 시위가 벌어지기 전, 법정 밖에서도 곧바로 감지됐다. 평결 직후 일부 시민이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발했고, 한 여성은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폭력 시위로 이어질까 우려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별도 성명을 내고 "평결이 많은 미국인을 분노케 하고 우려하게 만들겠지만, 우리는 배심원의 결정을 인정해야 한다"며 "모든 이들이 법치에 부합하게 평화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길 촉구한다"고 호소했다.
정치권의 반응은 엇갈렸다. 대표적으로 론 존슨 공화당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무죄 평결로) 정의가 실현됐다"고 적은 반면, 그웬 무어 민주당 하원의원은 "(사법)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비판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는 이번 평결에 대해 "양극화된 미국의 분열을 확대시키고 있다"며 "리튼하우스는 미국의 정치적 분열이 지도화된 인간 캔버스와 같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