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미일 3국의 외교차관 공동기자회견이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이 돌출되면서 무산됐다. 일본이 한국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트집 잡아 회견을 거부한 것이 표면적 이유지만, 외교가에선 “한일 사이에 누적된 갈등이 워싱턴에서 폭발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미일 3각 안보협력에 균열을 낼 정도로 한일관계가 심각해졌다는 의미다. 중국 포위망 구축을 위해 3자 협력이 절실한 미국이 한일관계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다.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인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17일(현지시간) 국무부 청사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만나 제9차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를 열었다. 협의회 직후 공동기자회견이 예정됐으나 일본은 돌연 16일 김창룡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참 입장을 전했다. 공동 회견은 결국 셔먼 부장관 단독 회견으로 치러졌다.
일본은 작심하고 워싱턴을 한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무대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독도 영유권’은 한일 양국 간 의제다. 한국 고위공직자의 독도 방문에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면, 양자 협의에서 얼마든지 따져 묻거나 협의 자체를 거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모리 차관은 공동회견은 피하면서도 협의회 이후 최 차관과의 별도 협의에는 응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18일 “한국의 위안부 합의 백지화와 사법부의 강제동원 판결 등으로 일본에선 반한 감정이 고조돼 왔다”며 “기시다 후미오 새 내각으로선 한국에 강경 대응하겠다는 제스처를 대내외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독도를 구실로 한일갈등을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계기와 장소를 골랐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는 난처한 표정이 역력하다. 가뜩이나 한일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되레 일본의 역공에 허를 찔린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차분한 대응을 택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일본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독도와 관련해 부당한 주장을 할 수 없고, 부당한 주장을 제기해도 우리는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만약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이유로 일본이 (기자회견에) 불참한 게 사실이라면 매우 이례적”이라면서도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영토임을 다시 강조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김 청장이 독도를 찾기 전 사전협의 여부에도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렵다”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사전협의 사실이 알려질 경우 한국 역시 고위급 인사의 독도 방문 계획을 놓고 고민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탓이다.
이번 파문은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도 큰 숙제를 안겼다. 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4자 안보협의체인 ‘쿼드’와 더불어 한미일 3자 협력체를 든든한 대중 견제 방패로 키우려던 구상에 큰 생채기가 난 것이다. 이에 지금껏 관망하던 미국이 한일관계에 좀 더 깊숙이 관여할 것이란 전망도 적지 않다. 미국은 한일 과거사 대립은 “양자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날 홀로 회견에 나선 셔먼 부장관도 “한일 양국이 해결해야 할 일부 이견이 있었다”며 과거사가 발목을 잡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동맹 관리에 허점이 생긴 듯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한일관계를 수습하는 제스처를 취할 것”이라며 “현 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한일관계 재설정은 다음 정권에서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