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정규직 되려 하니 말려라"... 숱한 차별을 딛고 반짝이는 6%

입력
2021.11.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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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20주년, 여성 노동자 증언집] 
퇴직 1순위, 비정규직에 홀로 남아
남성 동료부터 설득해야 하는 이중고
성폭력 예방 규정, 여성 작업복 등 성취


"1998년 회사가 정리해고를 시작하면서 희망퇴직 순서를 통보했는데 1순위 식당 여성 조합원, 2순위 맞벌이 중 여자, 3순위 가족 둘 이상이 다닐 경우 여자. 모두 여자가 우선순위였어요."

"사내하청업체에서 동료 남성들이 전부 정규직이 되는 동안, 저 혼자 비정규직으로 남았어요. 회사 인력관리 담당자가 아버지를 찾아와서는 '딸이 남자들 틈에서 정규직이 되려 하니 말려라'라고 했죠. 그때 아버지가 말하셨어요. '우리집은 딸만 넷인데, 그럼 우리 딸들은 평생 정규직 한 번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나?'라고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식당에서 일하던 정영자(61)씨, 그리고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사내하청업체 노동자였던 김미희(40)씨의 사연이다. 정씨는 외환위기가 닥치자 단 하나의 이유(성별) 때문에 희망퇴직 '1순위'가 됐다. 여성이기 때문에 잘리고 복직이 늦어졌다. 2002년 입사했던 김씨는 여성이기에 정규직 전환에서 제외된 경우였다.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발간한 여성노동자 증언집 '여성노동자, 반짝이다'(나름북스)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이다.


대우자동차(한국지엠)에서 34년간 자동차를 만들다 정년퇴직한 62세 이노이씨부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업체에서 용접일을 했던 27세 변주현씨까지. 나이와 지역, 하는 일은 다르지만 노동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설움, 여기에 더해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직장 안과 바깥의 차별과 폭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입사 이래 생산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성이란 이유로 적은 임금을 받았던 한국지엠 노동자 이노이씨는 정년퇴임을 1년 앞둔 2018년 겨우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아냈다. 임신하고도 회사에 다닌 첫 타자였던 삼남전자의 엄미야(47)씨는 육아휴직을 쓰려고 했다는 이유로 책상이 창고로 치워졌다.


차별은 남성 동료로부터도 가해졌다. "커피는 여자가 타 줘야 맛있지." "남편 밥은 차려주냐? 아침 밥도 못 얻어먹는 남편이 불쌍하다." 금속노조의 여성 조합원들이 조직 내에서 들었던 말이다. 금속노조는 올해 5월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았는데, 그 내용들은 금속노조가 여전히 가부장제 조직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중장비, 철강, 자동차 등 굵직하고 거친 업종이 모인 국내 최대의 산업별 노동조합인 금속노조는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조합원 18만 명 중 94%가 남성으로 여성은 단 6%(1만 명)에 불과하다.


엄미야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아이 돌봄을 두고 남편과 갈등을 빚었다. 투쟁할 때에도 남성 노동자와는 달리 농성장에 아이를 데리고 와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6%의 여성들이 해낸 일은 적지 않다. 크게는 금속노조의 '성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한 규정'에서부터 작게는 여성용 작업복, 여성의 손 크기에 맞는 공구까지. 대륙금속의 서인애(32)씨는 "노조를 만들고 나서는 언어폭력이나 성희롱이 싹 없어졌다"라고 전했다.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금속노조에는 여성 부위원장은 있지만, 20개 지부장 중 여성은 없다. 사업장에서 회사를 상대하는 교섭위원 중에도 여성은 드물다. 회사와 맞서기 전에 남성 노동자 역시 설득해야 한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의 한 여성 간부는 "회사랑 싸우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회사가 아닌 남성 간부와 남성 조합원들"이라고 단언했다. 성별에 따른 임금 차별등의 문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고용불안 등에 밀려 성차별은 결국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

이는 금속노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노총 전체로 넓혀 봐도 100만 명에 달하는 조합원 중 여성은 28만 명에 불과하고 한국노총도 120만 명 조합원 중 여성은 20만 명 남짓이다. 2021년 10월 기준 여성의 고용률(52.4%)이 남성(70.8%)과 18.4%포인트 차이가 난다는 점을 감안해도 큰 격차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소중하다. 임혜숙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부원장은 말한다.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바쁜데 사소한 데 목숨 건다는 반응이 많았죠. 그래도 우리는 남성 중심 사회에 사니까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이야기해야 해요."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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