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 9(2009)'의 닐 블롬캠프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를 모은 '오츠 스튜디오'. 스토리가 이어지는 시리즈도 아니고, 세계관이나 주제가 연결되는 옴니버스도 아니다. 닐 블롬캠프가 운영하는 영화사 '오츠 스튜디오'에서 만든 단편을 모았을 뿐이다. 넷플릭스에 단편영화 섹션은 따로 없지만, 10분도 안 되는 단편이나 애니메이션들이 종종 올라오니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도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봤다.
닐 블롬캠프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출신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로 유명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18세 무렵, 가족 모두 캐나다로 이주하여 밴쿠버의 필름 스쿨에 들어갔다. 컴퓨터그래픽(CG) 특수효과와 애니메이션 등을 배운 닐 블롬캠프는 광고 영상을 만들거나 직접 단편을 제작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이 제작하는, 게임 '헤일로'를 각색한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됐다. '헤일로'의 영화화가 엎어지면서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가 만들었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2005)'에 관심을 가졌고, 장편영화로 제작하게 됐다. 이 영화가 바로 대성공을 거둔 '디스트릭트 9'이다.
'디스트릭트 9'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배경의 SF다. 요하네스버그에 불시착한 외계인은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디스트릭트 9'에 임시 수용된다. 시간이 흐르며 '디스트릭트 9'은 무법천지가 됐고, 정부에서는 철거 계획을 세웠다. 닐 블롬캠프는 외계인에 대한 차별과 인종분리 정책을 빗대며 독특한 감성의 SF를 연출했다. 케이프타운 흑인 격리구역 이름이 '디스트릭트 6'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에 철폐했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차별하고 격리하며 거대한 벽을 세운 것처럼.
'디스트릭트 9'은 기존 할리우드 SF와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차별받고 박해당하는 설정이 흥미롭고, 캐릭터의 관계와 장면 연출 등이 거칠고 투박해 오히려 생생한 느낌을 준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서 만든 '엘리시움(2013)'은 애매했다. 극소수의 최상층이 살아가는 '엘리시움'이 하늘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엉망진창이 된 지상에서 살고 있다. 분리된 집단을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너무 말끔해서 닐 블롬캠프만의 색깔이 희미했다. '채피(2015)'에서는 다시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간다.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테트라 발'을 기초로 한 '채피'는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갖게 된 로봇의 이야기다. 하지만 닐 블롬캠프의 도발적 상상력은 안일하고 밋밋했다. '디스트릭트 9'의 들끓던 에너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닐 블롬캠프의 새로운 도전은 너무나 유명한 '에일리언' 시리즈였다. 2015년 초, 닐 블롬캠프는 '에일리언'의 새로운 콘셉트 아트 이미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2편에서 살아남은 리플리와 힉스 그리고 에일리언 제노모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스토리를 기획하는 중이라고 닐 블롬캠프는 발표했다. 당시 '에일리언' 시리즈는 에일리언의 근원을 파고드는 '프로메테우스'에 이어 '에일리언 커버넌트'를 리들리 스콧이 직접 만들고 있었다. '에일리언: 커버넌트'가 개봉한 후, 닐 블롬캠프가 기획 중이던 '에일리언: 어웨이크닝'는 중단됐다.
닐 블롬캠프가 '오츠 스튜디오'에서 본격적으로 단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에일리언' 연출이 무산되자 함께 기획을 하던 시고니 위버와 단편 '라카'를 만들었다. '라카'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 모든 국가를 장악하고, 그들에게 맞게 기후까지 테라포밍(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 작업)한 미래가 배경이다. 시고니 위버는 외계인에 맞서는 저항군의 대장이다. 마치 '디스트릭트 9'의 차별받던 외계인들이 복수를 위해 지구로 귀환한 느낌도 든다. 작품의 퀄리티는 할리우드 장편 못지않게 좋다. 특수효과도, 액션도 뛰어나다.
외계인과 싸우기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폭탄이 필요하다. 폭탄을 만드는 남자는 방화광이었던 노쉬다. 외계인 침공이 없었다면 노쉬는 흉악한 범죄자로 일찌감치 격리됐어야 한다. 하지만 아포칼립스의 시대에 노쉬는 가장 필요한 인간이다. 저항군은 비윤리적 거래를 해서라도 노쉬에게서 폭탄을 구해야만 한다. 법도, 질서도, 도덕도 '라카'의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무엇보다 외계인을 물리쳐야만 인간의 미래가 존재한다. 아니라면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테니까.
'자이고트'는 '에일리언'의 영향을 받은 게임 '데드 스페이스'를 연상시키는 단편이다. 우주 어딘가의 광산에서 괴물이 나타나 모든 생명체를 죽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여자와 남자가 도망친다. 내용은 이것뿐이다. 엄청난 긴장감이 있고, 괴물의 설정과 디자인이 매우 인상적이다. 죽인 자들의 몸과 영혼이 괴물의 몸에 이식되는 설정은 종종 있었는데, '자이고트'에 나오는 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흐른다. 절대로 저 괴물에게만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바클리역으로 다코다 패닝이 출연했다.
'파이어베이스'는 1969년 베트남 전쟁의 기밀 영상으로 시작한다. '강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나타나 미군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총으로 쏘고,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도 죽지 않는다. 미군의 공격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베트남 농부가 변했다는 강의 신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미군을 공격한다.
'라카', '자이고트', '파이어베이스'는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획으로 보인다. 실제로 '파이어베이스'는 제작비 펀딩을 추진했지만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이력에서 보이듯, 닐 블롬캠프는 단편을 바탕으로 장편 '디스트릭트 9'과 '채피'를 만들었다. 단편의 아이디어와 연출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은 좋았지만, '채피'는 실패작이다. '오츠 스튜디오'의 단편을 보면, 장편으로 보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와 연출력, 콘셉트 아트를 보여준다. 하지만 장편으로 갔을 때, 과연 단편의 파괴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닐 블롬캠프는 아이디어와 콘셉트 디자인은 탁월하지만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충실하게 끌어가는 능력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자유가 주어졌을 때 모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감독일까?
이 외에 '나쁜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가 연상되는 미국 대통령의 기행을 풍자한 단편이고, '빌의 요리교실'은 1980년대 홈쇼핑 광고의 형식을 가져와 기괴한 상황을 연출한다. 애니메이션인 '애덤'과 '그단스크'도 있다. '애덤'은 범죄자의 뇌를 로봇에 집어넣고 추방하여 죽게 하는 컨소시엄이라는 집단이 나온다. 컨소시엄에 대항하는 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처럼 보인다. 이처럼 '오츠 스튜디오'는 아이디어가 탁월하고, 흥미로운 영상을 보여주는 단편들이 가득하다. '라카'와 '자이고트'는 장편으로도 보고 싶지만, 닐 블롬캠프의 다음 장편이 대성공을 거두지 않는 이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할리우드에서 창작의 자유는 결국 대단한 성공에 따라오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