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인생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인 두 사람은 군내 사조직인 '북극성회'와 '하나회'를 이끈 주축으로 1979년 10·26 사태에 따른 혼란기를 틈타 12·12 군사 반란에 앞장섰다.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고 퇴임 후 내란죄로 구속되는 영욕을 함께 했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한 두 사람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부터 본격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후배들을 이끌고 '군사혁명 지지 카퍼레이드'에 나서면서다. 이후 12·12 군사 반란을 거치면서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경위도 동일했다. 전 전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신군부를 이끌었다면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뒷받침한 '2인자'였다.
노 전 대통령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봤을 만큼 돈독했던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다. 노 전 대통령이 내심 육군참모총장 임명을 바랐지만, 오히려 반강제적으로 전역을 당했기 때문이다. 육군 수장이 되지 못한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에서 체육부·내무부 장관 등을 거치며 차기 대선주자로 입지를 다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한 1987년 6월 민주항쟁도 두 사람의 우정을 시험한 사건이었다. 민주정의당 대선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에 빨간불이 켜지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며 임기 말 전두환 정권과 거리두기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 취임 후 두 달 뒤 치러진 1988년 13대 총선은 두 사람이 틀어진 결정적 계기였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5공과 단절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요구를 노 전 대통령이 수용하면서다. 그간 '상왕' 노릇을 했던 전 전 대통령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서 내려왔고, 전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새마을운동본부 명예총재는 수십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13대 총선 참패로 여소야대 국회가 되면서 정국 주도권은 야권으로 넘어갔다. 야권의 '5공 비리 청산' 요구에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유치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참석을 만류한 것이다. 그해 11월에 열린 '5공 청문회' 이후 전 전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전 전 대통령의 백담사 유배 동안 노 전 대통령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1990년)을 선언하면서 전 전 대통령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두 사람은 1996년 1월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12·12 군사반란 등에 따른 내란죄로 구속 기소되면서 또다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1996년 8월엔 1심 선고를 기다리는 재판정에서 두 손을 맞잡은 모습은 화제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11년 회고록에서 "우리는 우정과 동지애가 강했지만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 없게 됐다. 전임자는 내게 배신감을 느끼며 서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간에는 좀처럼 화해의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다. 다만 전 전 대통령은 2014년 8월 예고 없이 노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 병상에 누운 노 전 대통령을 향해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말을 건넸고, 노 전 대통령은 눈을 깜빡이며 화답했다. 두 사람의 생애 마지막 만남으로 전해진다.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부고 소식을 듣고 별 말 없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어서 빈소를 조문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