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배터리 시장에 진출한 삼성SDI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세계 최대 시장 진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투자금 문제로 진출 과정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경쟁사에 유리한 고지를 내줬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나온다.
24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삼성SDI는 지난 5월부터 글로벌 완성 기업인 미국의 스텔란티스와 합작법인 설립을 논의했다. 하지만 스텔란티스가 7월 'EV데이'를 개최하고 전동화 전략을 발표할 때에도 구체적인 배터리 수급계획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업계에선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각각 미국의 1, 2위 완성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 포드와 이미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스텔란티스의 주요 파트너는 삼성SDI로 점쳐졌다.
하지만 지난 18일 LG에너지솔루션이 스텔란티스와 연간 40기가와트시(GWh) 규모의 합작공장을 설립하겠다고 깜짝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삼성SDI가 수주 경쟁에서 밀린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기 시작한 것. 이튿날 언론에선 삼성SDI도 스텔란티스와 합작사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삼성SDI 측에선 함구했다. 투자나 수주 실적을 알리는 데 적극적인 기업들의 관행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모습이다.
이어 3일 뒤인 22일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합작사 설립을 공식화하는 공동 자료를 배포했다. 하지만 생산규모는 23GWh로 LG에너지솔루션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이에 대해 업계에선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이 지난 9월 초 미국 출장 도중 스텔란티스 측과 직접 접촉, 이번 합작사 설립에 대해 합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SDI가 투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전동화 전환에 마음이 급한 스텔란티스를 설득했고 합작사 설립까지 이끌어냈다는 시나리오다. 삼성SDI가 스텔란티스 물량을 LG에너지솔루션에 내줬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삼성SDI 측은 "완성차 업체는 한 가지 배터리 타입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LG와 삼성 모두 고객사가 될 수 있다"며 "합작사 생산 규모는 향후 40GWh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 안팎에선 삼성SDI 최근 행보와 관련, 안전 지향적인 성향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삼성SDI가 투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배경과 적지 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시각에서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브랜드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삼성SDI 배터리를 쓰는 전기차에서 화재가 발생해 리콜로 이어지는 사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부회장이 가석방 출소 11일 만에 전격 발표한 단일기업 최대 규모인 240조 원 투자계획에서도 반도체·바이오·차세대 통신·인공지능(AI) 등이 언급됐지만, 정작 배터리 분야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실제, K배터리 3사 가운데 삼성SDI의 생산 시설 투자는 소극적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올해에만 미국·유럽·동남아·중국 등에 각각 7조~9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쏟아냈지만, 삼성SDI 투자규모는 이번 합작사 설립까지 포함해 2조 원 안팎에 그치고 있다. 미국 시장 진출 역시 공격적인 투자보단 2025년 발효 예정인 미국·캐나다·멕시코 무역협정(USMCA) 대응 차원이 강하다는 게 업계 해석이다. USMCA에 따르면, 완성차 업체가 무관세 혜택을 받기 위해선 주요 소재·부품의 75% 이상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
여기에 삼성SDI의 미국 내 주요 고객사로 알려진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이 이달 초 기업공개 신청서를 통해 자체 배터리 생산 계획을 공개한 것 역시 삼성SDI의 투자에 발목을 잡은 게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룹 내 입지가 불안해지자 인력 유출마저 이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SDI가 전기차 배터리 부문 투자에 소극적인 것은 그룹 내에서 배터리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돼 내부에서도 불만이 있을 정도"라며 "노스볼트 등 후발 각형 배터리 업체에 삼성SDI 인력 상당수가 이직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