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귀신에게 페이를 제시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자본의 권력은 강력했던 것 같다. 물론 오늘날의 자본주의 구조에서 자본 권력은 더 말해 뭣하겠는가!
그러나 자본이 행복을 위한 중요한 수단임에 분명하지만, 자본만으로 인간은 행복하지 않다. 만일 돈으로 행복하다면, 부자는 모두 행복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돈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화석 같은 종교 주장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귀신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1994년 국민소득 1만 달러에서 현재 3만 달러가 넘었지만, 그만큼 비례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소득이 높아졌음에도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더욱 예민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 점에서 행복은 자본과 같이 흐르지만, 동시에 다르게 흐른다. 붓다 역시 왕자라는 화려한 배경을 버리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출가하지 않았던가!
어떤 이들은 행복의 해법이 무소유에 있다고 본다. 가질 때의 기쁨만큼이나 잃을 때의 상실은 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소유가 없다면 불행도 없다는 판단이다.
인도는 무더운 기후에 속하므로, 철저한 무소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이나교처럼 나체주의자가 된다. 다소 민망한 무소유인 셈이다. 이들의 엄격한 기준에서 보면, 불교 역시 소유자들이 된다. 이 때문에 붓다는 종종 무소유자의 비판에 직면하곤 했다.
이때 붓다는 행복은 소유가 아닌 집착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핵심은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즉 행복의 코드는 무소유가 아닌 무집착에 있다는 관점이다.
무집착은 소유를 부정하지 않는다. 정당하고 필요한 기간만큼 소유하지만, 효용성이 다하면 미련 없이 내려놓으라고 가르칠 뿐이다. 마치 영화를 몰입해서 보지만, 영화가 끝나면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소유하지만 집착하지는 않는 삶이다. 이렇게 되면 벌이 꽃에서 꽃을 이동하듯, 자신을 무너트리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된다. 만일 벌이 특정한 꽃에 집착한다면, 꽃의 시듦과 함께 벌 역시 고통을 받지 않겠는가?!
선불교에서는 소유와 집착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한 노승과 젊은 승려가 다리를 걷고 냇물을 건너려는데,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난감해하고 있다가 '안아서 건네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노승은 바로 오케이를 하고 날름 안아서 건네준다. 이후 젊은 승려는 이 노승의 행실을 괘씸히 여기며 곱씹다가, 20㎞를 간 뒤에 폭발한다. '스님의 행동은 수행자답지 않고 불순하다.' 그러자 노승은 지긋이 웃으며 말한다. '나는 강을 건너고 여인을 내려놨는데, 너는 아직도 안고 있구나.'
세상에는 명언을 외우는 분들이 많다. 귀감이 되는 말을 통해 인생의 지침을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뜻을 이해했으면 말은 잊으라고 가르친다. 제아무리 명언이라도 말에 걸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을 보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차를 좋아하는 분이 새 차를 뽑은 직후 접촉 사고를 당하면,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렌터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차라는 소유를 떠나면, 보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어떠한 경우라도 주인공인 내가 수단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하는 무집착을 통한 행복의 비밀코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