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함께 부동산 폭등은 전 세계가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인데요. 독일의 수도 베를린 주민들이 이를 타개할 혁신 실험을 벌여 주목받고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주택 임대료를 더는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베를린 주민들이 반기를 들었는데요. 대형 부동산 업체가 소유한 주택 24만 채를 몰수하자고 말이죠. 부의 재분배, 주택·토지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하자며 주민들이 직접 들고 나선 겁니다.
베를린 주민들의 실험은 5개월 앞으로 다가온 한국의 다음 대선(2022년 3월 9일)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 투기 사건과 최근 화천대유자산관리의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까지 부동산은 국민이 분노하는 단어가 됐죠.
민심을 폭발하게 한 부동산 문제는 대선 표심의 향배를 결정할 것 같습니다. 대선 주자들도 표심을 사기 위해 주택 몰수 못지않은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는 만큼, 내년 3월 차기 대선을 앞두고 어떤 실험이 벌어지게 될까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주택 24만 채 몰수'를 골자로 치러진 베를린 주민투표 집계 결과 찬성 56.4%로 가결됐습니다. 반대는 39%에 그쳤죠. 아파트 등 주택 3,000채 이상을 보유한 민간 부동산 업체 10곳의 주택을 강제 수용해 국유화로 전환한 뒤 공공임대로 돌려주자는 내용입니다. 임대료는 부동산 시장 평균 가격보다 낮아야 한다는 단서도 있죠.
이번 주민투표는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이 2019년에 추진해 이뤄졌습니다. 도이체보넨은 독일의 대표 부동산 기업인데요. 베를린의 임대주택 전체 물량의 15% 정도인 24만 채가 몰수 대상에 해당합니다. 몰수라고 해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사유재산을 강제로 뺏는 건 아닙니다. 시가 부동산 업체에 일정 금액을 지불해 주택을 매입해야 합니다.
베를린 주민들이 '몰수'란 강경책까지 들고나온 건 미친 듯 뛰어오르는 월세를 잡고자 초강수를 둔 겁니다. 베를린은 시민의 82%가 임대주택, 월세로 살고 있는데요. 베를린은 과거 월세가 저렴하기로 유명했고, 시민들이 살기 좋은 주거 환경은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 월세가 두 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2012년 1㎡당 6.6유로(약 9,000원)였던 평균 월세는 10.5유로(약 1만4,000원)까지 올랐습니다. 올 상반기 평균 월세는 5년 전인 2016년과 비교하면 42%나 뛰었습니다.
다만 이번 주민투표가 법안에 대한 투표는 아니었기에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민들이 정치적 의견을 낸 만큼 시도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새 시장을 강하게 압박할 카드인 건 분명하죠. 주민투표와 함께 총선과 시의회 선거도 치러졌는데, 시정 반영 여부는 새 시장이 결정하게 됩니다.
강경책을 밀어붙인 주민투표 결과도 놀랍지만,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토지공개념'을 명시한 독일 기본법입니다.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이 강제 보상 수용 주민투표 발의 근거로 삼은 게 바로 이 조항입니다.
독일 기본법 15조는 '토지와 천연자원 및 생산수단은 사회화를 목적으로 손해배상의 방식과 규모를 규정한 법률에 근거해 공유재산이나 공유경제의 다른 유형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사회화는 공유화를 뜻하는데, 즉 공공을 위한다면 강제 수용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다만 공유화할 경우 보상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죠.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과 베를린 주민들은 토지 공개념에 대한 고민을 행동으로 보여준 겁니다.
토지공개념은 이제 우리에게도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여권은 토지공개념 도입을 꾸준히 주장해 왔는데요. 공론화한 건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3월에 발의했던 헌법 개정안에 토지공개념을 담았죠.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해 특별한 제한 또는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여야 대치로 논의 없이 무산됐죠.
민주당은 2018년 8월 당의 헌법인 강령에 토지공개념을 추가했습니다. '토지와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하고 공공성을 갖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문구로 토지공개념 원칙을 당이 가야 할 방향으로 정했죠. 2020년 2월 당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토지공개념은 헌법 정신에 담겨 있지만, (개헌 논의를 통해)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이 정권 유지에 성공할 경우 토지공개념 도입 논의도 속도가 붙을 수 있습니다.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경쟁자인 이낙연 전 대표 모두 토지공개념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이 지사는 앞서 7월 6일 부동산 정책 방향에 대해 밝혔는데요. 이 지사의 정책 브랜드인 '기본 시리즈'를 넣은 '기본주택' 활성화입니다. 질 좋은 주택을 싼 값에 평생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대폭 확대하고, 일반 분양은 최소화한다는 방침이죠.
이 지사는 최근 한술 더 떠 불로소득 100%를 환수하는 '개발이익 국민 환수제' 도입도 제시했습니다. 그는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서 열린 '개발이익 환수 제도의 문제와 개선 방안에 대한 긴급 토론회'에 참석해 "이 나라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부동산 투기, 토건 비리를 원천 봉쇄해야 한다"며 "토지 일원화로 생기는 불로소득은 반드시 100% 공공에 환수해 국민 모두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 대표는 '토지공개념 3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을 했던 7월 6일 "헌법 해석상 토지공개념은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집행력이 확보되지 않기에 법률로 뒷받침해야 한다"며 토지공개념 3법 필요성을 밝혔는데요. 구체적으로 ①법인의 택지 소유를 제한하고 개인의 택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는 '택지소유상한법' ②환수 부담률을 대폭 높이는 '개발이익환수법' ③장기간 방치된 토지에 대해 가산세를 강화하는 '종합부동산세법'입니다.
이 전 대표는 토지공개념 3법을 통해 거둔 세금은 국토 균형발전과 청년 주거,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사용한다고 했는데요. 그러면서 "땅 부자에 대한 증세는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정권 교체를 노리는 국민의힘에서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 주거 정책을 내놨는데요. 집값에 대한 성난 민심에 국민의힘도 '좌클릭'을 한 겁니다. 정권 교체를 위해선 부동산만큼은 보수 이념에 갇혀선 안 된다고 판단할 걸로 볼 수 있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8월 29일 '청년 원가 주택' 공약을 내놨는데요. 청년 원가 주택은 무주택 청년들에게 건설 원가로 살 집을 공급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원가로 분양받아 5년 이상 거주한 뒤 매각을 원하면 국가가 환매해 다시 싼 가격으로 다른 청년에게 공급한다는 발상입니다. 매각 시 분양가에 주택 가격 상승분의 70%까지 더한 금액을 받게 됩니다. 싼 집에 살 수 있는 건 물론 부동산으로 목돈을 마련할 기회도 갖게 되는 것이죠.
다른 야권 주자들이 '이 지사보다 더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보수정당으로선 의외의 선택이죠. 윤 전 총장의 강력한 경쟁자인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분이 사회주의 체제하에 주택 정책을 말한 것인지 의아스럽다"고 했고, 유승민 전 의원 캠프는 "2,000조 원의 국가 재원이 들어가는 포퓰리즘으로 청년을 농락했다"고 꼬집었습니다.
홍 의원의 부동산 공약은 '쿼터 아파트'입니다. 서울 강북 지역에 재개발을 확대한 뒤 현 시세의 4분의 1 가격으로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홍 의원의 공약은 싱가포르형 공공주택인 '토지 임대부 아파트'에서 따온 겁니다. 모든 국토를 국유화한 싱가프로에선 토지를 뺀 건물만 분양하는 형식으로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한다는 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