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컴퍼스... 이건용 화백 바디스케이프 연작 한자리에

입력
2021.09.1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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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에서 10월 31일까지

보통의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고 뒤에 섰다. 키만 한 캔버스 뒤에 서서 앞으로 손을 뻗고는 손이 닿는 곳까지 붓질을 했다. 칠한 부분을 접어 같은 방식으로 붓질을 하자 손이 더 길게 닿았고 선은 길어졌다.

작가는 캔버스를 등지고 서기도 했다. 캔버스를 보지 않고 사방으로 손을 뻗어 붓질을 하니 인체 형상만 빈 여백으로 남았다. 양팔을 아래위로 뻗기도 했는데, 천사의 날개 같은 형상의 결과물이 생겼다.

캔버스와 나란히도 서 보았다. 옆으로 서서 한 팔로 원을 그리듯 최대한 뻗어 붓질을 하고, 반대편도 똑같이 하니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트 모양이 완성됐다. 컴퍼스가 원을 그리듯, 어깨를 축으로 놓고 작은 반원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그의 신체가 움직일 수 있는 만큼만 작업이 남았다.

‘신체 드로잉’으로 잘 알려진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 이건용(79) 화백의 개인전 ‘바디스케이프(Bodyscape·신체의 풍경)’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1976년 처음 발표된 바디스케이프의 9가지 연작이 모두 신작으로 제작돼 한 공간에 모였다. 현상학에 관심을 보여 왔다는 이건용 화백은 “그림 밖에서 그림을 보려 했다”며 “밖에서 그 현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객관적으론 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바디스케이프 연작은 ‘전복의 회화’로 불린다. 캔버스의 화면을 보면서 생각을 손으로 옮겨 그리는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캔버스를 보지 않거나 뒤로 가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회화를 성찰해 왔다”고 말했다. 19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억압적인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을 긋기도 했다. 손목과 팔을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 말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에서는 기존보다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 게 돋보인다. 전시장 2층에 있는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의 바탕에 그려진 12점의 하트 모양의 작품 앞에서 그는 “100호짜리 하트 100점을 큰 미술관에 걸고 싶다. 그러면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 거장)도 보고 울고 갈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하 1층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제 작품은 누구나 다 따라 할 수 있어요. 현대미술이 자기 중심적이어서 대중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경향이 있는데, 제 그림은 소통하는 그림이고 싶어요."

전시는 10월 31일까지.

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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