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경남 합천 대양면으로 돌아와 25년 동안 채소 농사를 짓고 있는 강모(57)씨는 마을에서 5년 넘게 아기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의 막내가 환갑을 앞두고 있는 강씨 본인이다. 그는 8일 “어르신 대부분 소득이 없어 이렇다 할 소비활동이 없고, 소비 주체가 사라지니 읍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도시로 떠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20여 년 사이 마을 인구는 70명에서 30명으로 줄었고, 때마다 농사 일을 도와주던 그의 이웃들은 이제 보행기 없이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강씨는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구원투수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 없는 합천 생활을 그는 상상할 수 없다.
전남 해남 마산면 원동마을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 마을의 원주민은 새송이 버섯을 재배하는 김황익(55)씨를 포함해 고작 12명. 그래도 중국(조선족), 캄보디아, 베트남에서 온 외국인 17명 덕분에 새송이 재배가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 김씨는 "마을엔 일할 만한 청년층이 없어 외국인 근로자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역경제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으니 날로 늙어가는 시골에 고마운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가끔 고향을 찾는 친구들은 이렇게 바뀐 풍경에 놀라기도 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서 저출산, 고령화로 고통받고 있는 전국의 농어촌에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오래전 떠난 젊은이들은 이런 '고향'의 변화가 낯설다. 혹여 이곳을 찾아도 스스로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지방의 소멸이 곧 고향의 소멸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외국인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지는 지난해 덮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잘 보여준다. 외국인 계절 근로자의 입국이 막히면서 일손을 아예 구할 수 없게 되면서 농촌지역은 초비상이 걸렸다. 원동마을도 예년 같았으면 30명 내외의 외국인이 일을 했지만 지금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 40%가량이 65세 이상 고령자인 경북 영양군도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근로자가 급감하며 폐농가가 속출했다. 이곳에서 대규모로 고추농사를 짓는 임모(68)씨는 “경작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지역의 마트 등 상점가에도 변화가 생겼다. 외국인이 집단 거주하는 농촌 지역인 경남 김해 동상동, 경북 경주 성건동 등은 서울 이태원 못지않은 외국인 거리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간판이 다양한 언어로 적힌 휴대폰 가게, 식료품점도 성업 중이다. 전남 해남읍에서 치킨 가게를 하는 양채희(47)씨는 “튀김닭 주소비층인 젊은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간 상황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없으면 영업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산 농수축산물 유통을 위해 설립된 농협 하나로마트조차 외국인을 타깃으로 식자재 코너를 개설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자국 향신료나 소스를 찾는 외국인이 많아 전용 매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며 “처음엔 반발하던 농민들도 요즘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청년들이 떠난 지방 마을에 외국인들이 경제활동인구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고향이 변하고, 사라지는 데 대한 상실감은 떨치기 힘들다. 어릴 적 추억을 온전히 간직한 오래된 집, 쇠락했지만 뛰놀던 물리적 의미의 고향은 있지만, 이같은 고향의 변화로 출향인들의 발길이 언제까지 그 공간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지난 6일 경남 사천시 대방동에서 만난 이순이(72)씨는 삼천포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한때 파닥거리는 물고기만큼이나 생동감 넘치던 곳이지만 어디까지나 옛날이야기예요. 젊은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이씨는 한때는 고된 일을 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 수출하는 꼬막 공장에서 일을 했다. 월급이 많진 않아도 직접 돈을 벌어 퇴근길에 반찬을 사는 재미, 명절에 내려오는 자식, 손주들 손에 용돈 쥐여주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60, 70대 아낙 20여 명이 공장에서 칼자루 하나씩 쥐고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쪼그리고 앉아 꼬막을 까는 일은 고됐지만 남편 흉, 자식 자랑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5년 전 일을 같이하던 동료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쓸 만한 노인이 없었던지 공장장이 외국인 아내를 데리고 왔다”며 “첨엔 말도 안 통하고 해서 ‘저래 갖고 일을 제대로 하겠나’ 싶었는데, 확실히 젊은 사람 손이 빨랐다"고 말했다. 3년 만에 그 꼬막 공장 인력 3분의 2가 베트남 등지서 온 젊은 여성들로 채워졌다. 이씨도 결국 올해 초 공장 일을 그만두게 됐다.
그 일이 힘에 부쳤던 사실을 떠올리면 ‘잘됐다’ 싶었다. 그러다가도 이씨는 10년 넘게 일하던 공장에서 밀리다시피 나온 사실을 되새기면 서글펐다. 그러나 어쩌면, 진짜 이유는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고향에서도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있었던 듯 했다. 그는 “이 동네서 70년을 산 토박이가 요즘 되레 이방인이 된 느낌을 받는다”며 “나도 우리 동네가 낯선데, 우리 자식들은 오죽하겠느냐”고 했다. 이미 고향을 떠나 수도권 등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이제는 찾아올 고향이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이씨의 딸 강선희(40)씨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향이 그리운 건 당시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 때문인데 막상 고향을 찾아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 속의 사람들이 아니니 고향의 의미가 퇴색했다”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삼천포 갈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물리적 고향이 있어도 명절을 계기로 고향을 찾지 않는 이 같은 변화는 거세게 진행 중이다. 경북 안동지역 농협 관계자는 “어른이 모두 돌아가신 경우 또 복잡한 명절엔 내려오지 않더라도 그 전 벌초 땐 고향에 내려와 성묘를 하던 사람들도 벌초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민족 대이동 명절’이란 표현도 곧 사라질 수 있다.
농협에 따르면 2019년 1만7,000건 수준이던 벌초 대행 건수는 지난해 40% 이상 늘어난 2만4,400건을 기록했다. 농협은 올해 벌초 대행 규모를 3만3,000건으로 늘리기로 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의 두 배 수준이다. 그만큼 고향으로의 발길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는 “청년들의 출향이 계속되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면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게 된다"며 "국가적 차원의, 제대로 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다시 떠날 이방인으로 채우는 정책으로는 해당 공동체가 지속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