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무슨 외국어 공부냐고 하는 한국 친구들의 생각을 깨고 싶었어요. 한국은 말로만 '평생 교육' 관점이 있는 나라죠. 방송통신대 등 관련 인프라를 잘 갖춘 데 반해 특히 외국어 학습은 젊은 사람의 일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4일 화상 통화로 만난 로버트 파우저(60) 전 서울대 교수는 "나도 환갑이지만 이탈리어를 새로 배우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외국어 학습에 관한 언어 순례자 로버트 파우저의 경험과 생각'이라는 부제를 단 책 '외국어 학습담'(혜화1117 발행)을 출간했다. 언어학자이자 언어 학습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가 많으면 외국어를 배우기 어렵다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외국어는 곧 영어'로 여기는 학습 생태계의 현실을 꼬집은 책이다. 3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을 직접 한글로 썼다.
파우저 전 교수는 앞서 2018년 고대 문명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어 전파의 역사와 영어 패권주의 도래의 배경을 분석한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 발행)을 역시 한글로 집필·출간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외국어 전파담'이 뜻밖에 인기를 얻은 후 '외국어 학습담'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독자와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잘할 수 있는지 묻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독자 반응은 그의 화려한 스펙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영어 외에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고, 독일어·스페인어는 현지 여행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구사한다. 프랑스어는 말하기 실력은 부족해도 읽는 데 부족함이 없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그는 청·장년기의 상당 기간을 일본과 한국에서 보냈다. 1980년대에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1990년대에는 일본 교토·가고시마 등지에서 일본어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2008∼2014년엔 서울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에 머물며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인 '독립학자'라는 타이틀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파우저 전 교수는 족집게 과외 같은 외국어 학습 비법을 콕 집어 소개하는 대신 "어제의 나, 그동안 만나 온 외국어와의 관계를 살펴볼 것"을 권했다.
"제 경우는 외국어가 교양을 쌓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도구죠. 이탈리아 음식 문화가 궁금해 이탈리어를 배우고 있고, 프랑스어는 학술서를 읽고 싶어 공부했죠. 스스로 외국어 학습의 의미를 성찰하고, 자신에게 맞는 목표 설정을 통해 즐겁게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특히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필요에 따라 외국어를 학습하는 시대가 열린 만큼 효율성 논리와 높은 기대치 설정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기보다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외국어 학습은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교양을 높이고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영어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파우저 전 교수는 이번에 전작 '외국어 전파담'의 개정판도 함께 내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겪으면서 직접 대면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주목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어 전파담' 출간 당시는 인공지능(AI) 발달로 외국어 학습의 여러 장벽이 극복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외국어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게 됐음을 팬데믹을 겪으며 깨달았다"고 말했다.
영어를 모어로 쓰는 그는 이번에 내놓은 저서 외에도 '서촌 홀릭'(2016),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2019) 등 한국어 책을 꾸준히 출간해 왔다. "재미와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외국어 학습자로서 주류 문화 계층인 '미국인 백인 남성'이 외국어 학습이 즐겁다고 하면 비영어권 국가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도 외국어 학습은 끝없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해요. 그렇게 힘들게 얻은 소통 능력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