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작가가 '악마판사'를 통해 다크 히어로의 열풍과 대중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법치주의 시스템의 면모를 꼬집었다.
최근 종영한 tvN 주말드라마 '악마판사'의 문유석 작가는 본지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며 늦게나마 소회를 전했다.
먼저 문유석 작가는 '악마판사'의 종영을 두고 "더 이상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볼 수 없다는 게 슬프다. 최초 20부작으로 구상했었는데 아쉽기도 하다"면서 "성원을 보낸 시청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악마판사' 속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이란 설정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문유석 작가는 가장 먼저 코로나19 팬데믹을 꼽았다. 세계 곳곳에서 경제가 붕괴되어 생계가 곤란한 이들이 늘었고 의회 의사당을 습격하는 일들이 벌어지며 문유석 작가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문유석 작가에게 '악마판사'는 '블랙 미러'나 '브이 포 벤데타' 같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물처럼 일종의 사고 실험의 일환이었다. 그는 "해외 시청자들이 '악마판사'를 보며 자기 나라 얘기라며 적극 공감하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한국 콘텐츠에 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은 만큼 창작자들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한 주제들로 관심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짚었다.
이에 따르면 '악마판사'의 세계는 시민들의 건강한 연대로 문제를 해결할 동력조차 사라진 가상의 디스토피아다. 그렇다면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판사 강요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배경 역시 궁금증을 자아낸다.
문유석 작가는 다크 히어로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두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라 지적했다. '악마판사'처럼 시민들의 분노가 폭주하고 미디어와 정치권력이 이를 악용하면 폭력과 극단주의, 혐오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우려가 함께 전해졌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런 세상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문유석 작가는 "시민들은 정치, 사법, 언론 등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 시스템에 해당하는 이들이 다크 히어로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 해서 다크 히어로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자기가 강요한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허중세"라며 소신을 드러냈다.
문유석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극중 강요한의 마지막 재판은 과연 재판일까? 사실 그것은 폭탄 테러를 생중계한 것에 불과하다. 합법적인 재판 절차가 아니고 제시된 증거 역시 동영상일 뿐 조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에서는 잠깐 폭로 동영상을 보고는 압도적 다수가 적법절차에 따른 재판 없이 폭탄 테러에 동의를 표시한 것"이라면서 의문을 제시했다.
아울러 극중 시민들이 전기의자 사형집행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며 망설이지만 폭탄 테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찬성했다는 점을 들며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 방향으로 유도되기 쉽기 때문에 법치주의라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극중 악역들이 처단당하고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한 엘리트들 역시 전과 그닥 다르지 않은 행태들을 보입니다. 결국 더디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시스템이 온전하게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가 오겠지요. 가온의 독백, '요한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악마판사' 속 캐릭터들에 대한 연구도 깊었다. 실제로 문유석 작가는 캐릭터들을 만들 때 아예 성별을 배제하고 만들었다. 성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렸기 때문에 권력가 차경희, 첫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형사 윤수현이라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나오게 됐다. 이와 관련, 문유석 작가는 "인습적인 성 역할에 갇혀 있는 캐릭터들은 뻔해서 재미없고, 그렇다고 여성들은 모두 주체적이어야 하고 남성들은 납작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편향도 작위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 개별적"이라 전했다.
작품의 중심을 잡아준 든든한 배우진의 활약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함께 전해졌다. 문유석 작가는 "만화처럼 과장된 디스토피아 설정에 고전 비극의 서사, 연극적인 문어체 대사, 의도된 찝찝함과 불편함 등 과잉될 만큼 밀어붙였던 것은 배우들을 믿었기 때문"이라면서 애정을 드러냈다.
문유석 작가는 "지성과 김민정이 없었다면 강요한과 정선아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누가 살릴 수 있었을까. 가혹한 운명 속에 고통을 받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진영 박규영도, 각기 다른 개성의 악역을 맡아 광기 어린 연기를 해 주신 장영남 안내상 백현진도, 소박하지만 공감 가는 인물을 연기해 주신 김재경도, 그 외에도 단역 분들까지 모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대본의 이상함과 부족함을 메워줬다"고 말했다.
촬영이 진행되며 배우들은 문유석 작가와 적극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배우들이 조언을 구할 땐 충분히 설명하고 대화를 나눴다. 반대로 배우들이 직접 분석한 생각을 대본에 녹이기도 했다.
특히 김민정이 분한 빌런 정선아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문유석 작가는 "정선아는 한국 드라마에서 본 적 없는 매력적인 빌런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캐릭터다. 아픈 과거가 있지만 자기 능력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천진난만한 쾌락주의자다. 왠지 지금 시대에는 이런 빌런이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캐릭터를 고안한 배경을 전했다.
극 말미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선아의 엔딩에 대해서는 "가장 밑바닥 취약계층에서 외롭게 자라 권력의 사다리를 오른 정선아에게는 이중 삼중의 굴레가 있었을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정선아를 인정하지 않고 낮춰보는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가 결국 마지막 선택의 동기가 된 것"이라 설명했다.
실제 판사 출신인 만큼 시범 재판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궁금해졌다. 이를 두고 문유석 작가는 "당연히 극중 시범 재판은 디스토피아 세계관 하에서의 사고 실험일 뿐 올바른 재판이라고 보기 힘들다. 실제 이루어지는 국민 참여 재판이나 배심재판은 단순한 여론 재판으로 흐르지 않도록 많은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면서 선을 그었다.
이처럼 '악마판사'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엄벌하는 국민 참여 재판의 이면을 보여주면서도 양날의 검처럼 사회에 위험한 변화를 야기하는 모습을 담아 많은 의미를 전했다. 또 시청자들에게 강요한의 방식이 옳은 정의인지, 디스토피아에서는 어떤 방식이 최선일지 등 생각해 볼 여지를 열며 깊은 여운까지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