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책임감'과 '생존 또는 부(富)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개인만이 아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이후 쏟아지는 아프간 난민을 두고 유럽연합(EU)이 갈라지고 있다. 2015년 겪은 시리아 난민 위기의 혼란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공감대는 있으나 저마다 해법이 다른 탓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아프간전에 참전한 만큼, 아프간인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의견과, 현실적 어려움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격돌하는 모습이다.
EU 회원국 내무장관들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아프간 난민 관련 회의를 열고 "대규모 불법 이주 움직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6년 전 중동에서 유럽으로 100만 명이 넘게 밀려온 시리아 내전 당시 혼란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표현이다. 하지만 5시간이 넘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공동 대응'이라는 큰 틀의 원론적 합의 외엔, 구체적 정책을 도출하진 못했다. "불법 이주를 유발하는 조치를 피해야 한다"고 성명에 적시했지만, 어떤 방식을 취할지는 정하지 못한 것이다.
아프간 난민 수용 여부부터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덴마크와 체코, 오스트리아 등은 "아예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런가하면 룩셈부르크는 'EU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다. 영국이 자국 내 아프간인 정착 규모 목표를 '향후 5년간 2만 명'으로 정한 것처럼, EU도 '4만~5만 명가량'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중한 입장을 보인 독일 등은 아예 "목표를 설정하자"는 의견에 크게 반발했다. 호르스트 제호퍼 독일 내무장관은 "수를 확정하면 유인 효과를 유발할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시리아 난민 위기 당시 유럽으로 온 난민의 59%를 수용하면서 정권이 흔들릴 만큼, 내부 홍역을 치른 독일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행 가능성이 가장 큰 정책은 일단 현금 지원이다. 이란,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아프간 주변국에서 고국을 떠난 아프간인들을 수용하도록 지원하는 방법인데, 정확한 액수는 정해지지 않았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일단 6억 유로(약 8,223억 원), 최대 10억 유로(약 1조3,706억 원)까지 지원하는 방안이 이날 논의됐다. 과거 시리아 난민 위기 당시에는 터키에 EU가 60억 유로(약 8조2,230억 원)를 지원해 유럽으로 오는 난민을 터키에 수용하도록 한 바 있다.
이미 EU 국경에서는 아프간 난민 갈등이 폭발 직전이다. EU의 동남부 국경선인 폴란드와 벨라루스 사이에 지난 한 달간 아프간 등 중동에서 온 이주민 약 3,000명이 몰려들면서다. 이날 폴란드는 이들을 막고 국경 경비를 더 강화하기 위해 30일간 국가 비상사태 선포 계획까지 발표했다. 지난주에는 국경선을 따라 길이 418㎞, 높이 2.5m의 장벽 건설도 시작했다. EU의 제재에 불만을 품은 벨라루스가 EU 소속 일부 국가(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 '난민 떠넘기기'를 한다는 게 폴란드와 EU의 주장이다. 갈등이 곪아가는 사이, 난민들은 화장실도 없는 야외에서 보름 넘게 노숙을 하면 국제사회의 지원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