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28일, 만 18세 서독 소년 마티아스 러스트(Mathias Rust, 1968.6.1~)가 경비행기 세스나를 몰고 철의 장막을 뚫고 크렘린궁 인근에 착륙했다. 당일 아침 핀란드 헬싱키 공항을 이륙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중 기수를 동쪽으로 틀어 소비에트의 철통같은 방공망을 뚫고 러시아 심장부까지 약 750km를 비행한 거였다. 냉전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소비에트 공군이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여객기(007편)를 격추한 게 불과 3년여 전이었다.
항공면장을 따고 50시간 비행기록을 달성한 러스트가 무모한 계획을 세운 건 약 6개월 전인 19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을 본 뒤였다. 핵군축과 지역문제 등을 의제로 한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러스트는 평화를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동서를 잇는 가상의 다리를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1987년 5월 13일, 그는 상업면장을 따려면 비행시간을 채워야 한다며 부모의 허락을 얻어 세스나기를 임대해 북유럽 비행에 나섰다. 그는 스코틀랜드 섀틀랜드 제도와 대서양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와 노르웨이 베르겐을 거쳐 그달 25일 헬싱키에 닿았다. 그리고 사흘 뒤 이륙, 핀란드 관제센터의 경고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러스트의 존재는 레이더 망에 즉각 포착됐고 두 차례나 미그기와 요격기가 출동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공격을 받진 않았다. 직전 항공기 추락사고의 민군합동 수색작전에 동원된 비행기로 소비에트 공군이 오인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건 그는 붉은광장 상공을 10m 높이로 비행하다 바실리대성당 인근 4차로 폭 교량에 착륙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9월 2일 시작된 재판에서 그는 4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고, 14개월 만인 1988년 8월 가석방됐다. 고르바초프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개혁·개방에 적대적이던 국방장관과 공군참모총장 등 강성파 군인 150여 명을 숙청했다. 러스트의 기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