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이 끝났고 뭉게구름을 타고 가을이 온다는 처서가 지났다. 곧 거리가 온통 검정과 회색조의 외투로 일렁이게 될 겨울이, 짧은 가을의 추석을 스쳐 찾아올 시기이다. 이맘때면 디자이너 시절의 검정에 관한 기억이 떠오른다. 올해는 도쿄 올림픽과 다시금 인기인 해체주의의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덕분에 그 잔상이 더 명징해져 버렸다.
2010년 전후였을 것이다. 얼떨결에 나라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패션대전’에 입상하면서 패션마케터가 되겠다던 나를 그 상은 신진 패션디자이너로 탈바꿈시켰다. ‘해외 패션위크를 가려면 한 해에 뉴욕과 파리를 둘 다 가야 한다’라는 말에 서울에서 뉴욕을 갔다 다시 서울에서 파리를 추석 때 가는 2주간의 스케줄을 석사 논문을 쓰며 잡았다. 파리 패션위크에서 뉴욕에서 봤던 바이어가 날 발견하고는 반가워하며 이런 조언을 했다. “당신의 블랙 드레스는 좋아요. 하지만 일본 디자이너의 블랙처럼 멋지진 않죠. 그들을 봐요. 더 멋져질 수 있을 거예요.” 어금니를 꽉 물며 영업용 미소로 응수했고, 한일전 응원을 하다가 갑자기 선수로 뛰게 된 기분으로 투사가 되어 귀국했다. 논문도 제쳐 두고 일본의 색에 대한 책과 논문을 보다 답을 찾았더랬다. 바라던 해답은 아니었으나 우문현답은 되었다.
1980년대에 요즘도 인기인 꼼데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 Y3로 친숙한 요지 야마모토가 풀어낸 일본의 검정과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검정의 해체주의(넝마주이, 거지 룩, 까마귀 룩 등등) 패션은 서양 패션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전에 평면인 1장의 옷감 그대로를 입체인 인체에 얹어 공간감을 연출한 이세이 미야케와 1970년대 다카다 겐조의 KENZO가 서양인들에게 일본 패션의 독특함을 알렸다. 레이 가와쿠보와 요지 야마모토가 선배가 닦아놓은 고속도로를 달린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검정과 회색조 패션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시작된 ‘검정의 계보’와 ‘사십팔다백서(四十八茶百鼠)’에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넘어온 검정을 즐기는 취향이 일본에 전해서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검정의 계보다. 이는 수묵화부터 1500년대에 일본 다도 문화를 완성한 센 리큐가 즐겨 쓴 검은색 찻잔과, ‘경칠류’라는 검술의 창시자인 요시오카 겐보가 ‘겐보조메’라는 갈색과 검정 염색 기법 등으로 현대에 전승되었다. 사십팔다백서는 1600년대에 상인 계급에 내려진 비단이나 빨간색, 노란색 등을 쓰지 못하게 한 사치 금지령에서 탄생했다. 상인들은 사치 금지령에 대한 반발로 사치스러운 것을 촌스럽다 치부하며 48가지의 갈색과 100종류의 회색으로 멋내는 것을 세련미라 칭하며 등장시킨 것이 사십팔다백서였다.
이 두 이야기로 투사였던 나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저 멋져 보이고 세련된 패션의 검정이 아닌 일본처럼 식문화나 직업이 녹아든 검정을 패션으로 가져올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5,000만 인구의 한국 패션이 아시아 패션으로 치부되는 ‘14억 인구의 중국스러움’과 ‘1억 인구의 일본다움’에서 백전불태(百戰不殆)하기 위해서 지피지기(知彼知己)하면 좋겠다. 그래야 한복이나 한곳에 모아놓기만 한 K패션이 아닌 ‘한국답게’의 정수를 세계시장에 불꽃놀이같이 터질 트렌드로 쏘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